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yul Jun 01. 2021

그 때와 다른 마음의 온도가 느껴졌다.

부모님께 스스로 잘 해내는 딸로 계속 남고 싶었다. 동생한테 잘 해내고 있는 누나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원하는 대학에 갔고 그곳에서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중심을 잡고, 무난~하게 적응했다. 아마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운다는 사실 하나가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마지막 남은 것은 취업이었다. 첫째로서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에 졸업 전에 취업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원하는 직업 관련 구직 사이트에서 마음에 드는 곳에 서류를 넣었다. 연락을 받고 서울에 가서 면접을 보고 난 후, 합격 전화를 받았다. 그 소식을 제일 먼저 아빠께 전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네가 바라던 것을 잘 이뤘구나, 졸업하고 취업 걱정은 없겠다, 잘 해냈네.” 이런 말들을 들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뭐라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하고, 뿌듯해했던 것이. 그러나 아빠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빨리했어. 아빠랑 상의도 안 하고. 누가 너더러 빨리 취직하라 했어?!”


(너무 오래돼서 조금 왜곡됐을 수도 있는데, 대충 이런 식의 대답이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니 당황하신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도 기뻐하기보다 아쉬워하셨다. 그래도 앞으로 잘하고 있는 걸 보면 부모님도 좋아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바뀌지 않았다.

밤새기를 밥 먹듯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아빠는 나와 통화가 될 때마다 ‘시골로 내려와라, 그만둬라, 돈도 많이 못 받으면서 뭐하러 다니냐’라는 말뿐이었다.

내 이름이 나오고, 힘들어도 꿋꿋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셔도 여전했다.

나는 나름 첫 직장에서 명절 선물로 과일 한 박스를 보내줬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좋았는데, ‘보너스도 안 주냐, 이게 다냐’라는 말만 하시는 아빠가 점점 미워졌다.

일도, 타지 생활도 모든 것들이 힘든데 불만만 표현하시니까 속상하고 서운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아빠 심정에 대해 들었다. 아빠는 졸업하고 집에 내려와서 쉬다가 천천히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취직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많이 놀라고 당황했다고 하셨다. 방학마다 아르바이트한 것도 안쓰러웠는데 쉬지도 못하고 바로 혼자 사회로 나간다고 하니 속상했다고 하셨다.


아빠의 표현방식도 잘못됐지만, 나도 잘못했다.

나 말고도 졸업하기 전에 취직한 동기들도 많았고, 방학 외에 학교를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또래들도 있어서 나 정도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조급하고, 나를 보는 시선이 관대하지 않아서 나보다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만 봤던 것 같다. 그래서 차마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제야 아빠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가 다였다.


나를 제대로 마주 보고, 사랑하고 나서 그때를 다시 떠올려보니 부모님의 마음이 더 자세하고, 확실하게 보였다. 그 때와 다른 마음의 온도가 느껴졌다. 호호 불어서 마시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한 겨울의 어묵국물처럼 무척 따뜻했다.


학교버스를 타고 서울로 바로 가니까 괜찮다던  말에 부모님은 그래도 힘들 거라며 많이 걱정하셨다. 부모님 말씀처럼 버스에서 지하철까지 타고 가고, 아침 일찍 나가서 너무 늦은 시간에 퇴근하면서 통근하고, 과제까지 틈틈이 하려니  체력은 바닥나기 시작했다. 늦게 퇴근하긴 했어도 직업 특성상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상황과 체력에 통근은   못되었다. 결국 부모님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자존심을 버리고 친척집에 나를 부탁하셨다. 여기서부터 부모님의 마음이 드러났었는데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맡겨는 놨지만 아무리 친척이라고 해도 그곳에서 편히 못 지낼 것도 아셨을 것이다. 더구나 약골인 애가 불규칙한 패턴에 잠도 못 자고 마음 편히 있을 곳도 없이 아득바득 일하는 것을 지켜보니 더 가슴 아프셨을 거다. 월급도 적은데 타지 생활에 생활비는 어떻게 하려는지 걱정도 되셨을 것이다. 내가 낙으로 삼을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을 것이다. 차라리 힘든 것을 눈앞에서 보기라도 하면 덜 답답했을 텐데 떨어져 있으니 딸이 얼마나 힘들지 감히 예상할 수 없어서 더 애가 타셨을 것이다. 그땐 이 모든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리 내가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듣는 딸이라도 스물하나, 스물둘이 많이 어리긴 했나 보다. 아니, 어린것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더 몰랐던 거겠지.


부모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마음도 몰라줬을 거다.

내가 기억하는 마음들, 기억나지 않는 마음들까지 모두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라진 시선으로 과거를 마주하고 나서의 결론_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