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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혼란 중에 피어나다

백가쟁명

by 결휘


지식, 혼란 중에 피어나다

기원전 6세기, 서쪽의 그리스에서는 탈레스를 필두로 한 자연철학자들이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신화가 아닌 논리와 경험을 통해 진리를 찾으려 했고, 지식의 시장이 열리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같은 시기 동쪽, 중국 대륙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를 일컬어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 곧 ‘진리라는 이름의 왕좌’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백 가지 다양한 지혜가 꽃피웠습니다.


역사는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로 구별합니다. 500여 년에 걸친 혼란과 전쟁의 시기였습니다.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중국의 여러 제후국들은 서로를 향해 창과 칼을 겨누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혼란은 철학과 사상의 황금기를 불러왔습니다. 질서가 붕괴되었기에,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도 그만큼 치열했던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말 그대로 피로 물든 시대였습니다. 주나라 왕실은 명목상의 존재일 뿐, 각 지방의 제후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집어삼키고, 한때 강성했던 제국들도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전쟁이 일상이었고, 권력이 움직이는 속도만큼이나 사상도 격변했습니다.

그리고 혼란 속에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진리라는 왕좌를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나라가 가장 강한 나라가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혼란을 종식하고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을까?’ ‘인간이란 본디 선한가, 악한가?’ ‘진정한 통치의 원칙이란 무엇인가?’ 같은 거대한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모든 사상은 질문에서 시작되었고, 그 질문들은 새로운 질문을 낳았습니다. 중국의 지식은 ‘사유’에서 기인하지 않고 ‘논쟁과 전쟁’의 실험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에 있어 보다 실천적인 지식이라는 특징을 갖습니다. 그들은 군주들에게 충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논쟁을 벌이며, 자신들의 사상을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철학이 국가 운영의 도구가 되었고, 사상이 곧 권력이 되던 시대였습니다.


백가쟁명의 시대에서 가장 대표적인 학파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년)를 중심으로 한 ‘유가(儒家)’였습니다.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바라보며, 질서와 도덕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이라는 덕목을 강조하며, 군주는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군주가 먼저 모범을 보이면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자는 “군군신신부부 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원칙을 강조했습니다. 즉,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 질서는 각자의 역할을 다할 때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전국시대의 군주들은 공자의 말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덕치(德治)는 이상적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훗날 한나라(漢) 시대에 국교로 자리 잡으며 동양 사상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유가가 덕을 강조했다면, 법가(法家)는 강력한 법과 통제를 통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은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233년)였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오직 엄격한 법과 강한 권력만이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법가는 "군주는 무자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군주가 신하를 지나치게 믿으면 배신당할 수 있으며, 백성들을 관대하게 대하면 통제를 잃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신하와 백성을 두려움 속에 두고, 강력한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사상은 진나라(秦)의 통일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법가 사상을 채택하여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법가는 지나치게 엄격한 체제를 만들어냈고, 결국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도가(道家)는 유가나 법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도가의 대표자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였습니다. 이들은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보았습니다.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강조했습니다. 즉, 억지로 다스리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장자는 한층 더 급진적인 사상을 펼쳤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보았으며,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군주조차 필요 없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도가의 사상은 당시 정치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직접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활용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많은 문학과 예술, 그리고 동양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은 저마다 지혜를 설파하며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유가는 도덕과 질서를 강조했고, 법가는 강력한 법과 통제를 내세웠으며, 도가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사상 중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는 시대에 따라, 나라에 따라, 통치자의 선택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시대가 동양 사상의 기초를 만들었고, 이후 이천 년 이상 중국과 동아시아의 문명을 이끌어 갔다는 점입니다. 진리라는 이름의 왕좌는 결국 어느 한 사상가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사상가들의 것이었으며, 그들의 논쟁과 사유 속에서 인간의 사고는 더욱 깊어지고 확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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