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진리"라는 이름의 왕좌

지식의 꿈

by 결휘
소크라테스.jpg

‘진리’라는 이름의 왕좌

철이 들고 얼마지 않아 제 꿈은 정해졌습니다. 제 인생의 목표는 “진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진리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 것은 집안의 오래된 종교적 환경 때문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라면서 배우게 되는 지식들과 종교의 지식들이 충돌한다고 느낄 때, 제 안의 갈등들은 자연스레 ‘진리가 뭘까?’라는 물음이 되었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주장들과 지식들이 저를 혼란하게 했지요.


진리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으로 진리는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정의되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소크라테스는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절대적 가치, ‘불변의 원리’를 추구했습니다. 중세 철학에서는 진리는 곧 ‘신의 속성’이 됩니다. 근대에 이르러 진리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검증 가능한 사실’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진리는 단순히 객관적 사실로 정의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진리는 맥락적이며, 문화적이고, 때로는 상대적입니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개인과 공동체는 서로 다른 진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적 기준은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됩니다. 한 문화권에서는 아름다움으로 간주되는 것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그저 평범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윤리의 기준도 동일합니다.


슬기는 단순한 사고 과정을 넘어, 인간이 지식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공동체를 이끄는 데 필요한 능력을 제공합니다. 인간은 슬기를 통해 지식을 축적하며, 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해 왔습니다.

이 모든 다양한 종류의 지식들은 마치 “진리라는 이름의 왕좌”에 오르기 위한 경쟁자처럼 보입니다. 진리는 인간 두뇌 활동의 결과물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목표이자 이상입니다. 단순히 "이것이 사실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들의 등장은 필연적이면서도 논쟁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고도의 수사학을 통해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전문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종종 궤변론자로 불렸는데, 이는 그들의 논리가 때로는 진리를 왜곡하고, 단지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등장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변론, 곧 대화의 방식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있어서는 소피스트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기기 위한 변론술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소피스트들은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설득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가 사용한 진리 탐구의 방법을 “산파술”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상대방이 스스로 모순을 깨닫고 진리에 다가가도록 돕는 정교한 대화 기법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러니, 엘렝코스, 마이에우티케 세 가지 요소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합니다.


1. 아이러니 (Irony): 무지의 가면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겸손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상대방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한 청년에게 “덕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청년은 자신이 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추가 질문을 통해 청년의 덕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고 모순적임을 드러냈습니다.


2. 엘렝코스 (Elenchus): 비판적 논박

엘렝코스는 소크라테스 산파술의 핵심 기법으로, 상대방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논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답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모순점을 지적하며,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대방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진리 탐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3. 마이에우티케 (Maieutics): 진리의 출산

마이에우티케는 '산파술'을 뜻합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마치 산파가 아이의 탄생을 돕듯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상대방의 마음속에 숨겨진 진리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대의 진리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서로 긴밀하게 작용하며,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완성합니다. 이는 단순한 논쟁 기술이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는 철학적 도구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아테네의 등에(The Gadfly of Athens)"로 비유하며, 시민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존의 지식과 전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했습니다. '등에'는 말이나 가축을 자극하여 계속 움직이도록 만드는 곤충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라는 거대한 말(국가)을 깨우는 등에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통해 그들의 사고를 흔들어 깨우고자 했습니다.

이는 결국 그에게 적을 만들었고, 그는 기원전 399년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국가의 전통 신을 믿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습니다. 아테네 법정에서 그는 변론을 펼쳤으나, 배심원단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는 독배를 마시며 "악법도 법"이라며 형을 받아들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Plato, 기원전 427~347년)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플라톤은 스승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했고, 이는 그가 진리와 정의를 탐구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론(Theory of Forms)”을 통해,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은 불완전한 것이며, 참된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보편적 진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진리는 단순한 사실적 지식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철학적 탐구였습니다. 그는 진리를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는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플라톤을 거쳐, 이후의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리를 정의하려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와 경험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였고, 중세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통해 진리를 찾으려 했으며, 현대 철학자들은 언어와 개념을 분석하며 진리를 규명하려 했습니다. 이처럼 진리 개념은 시대와 학문에 따라 계속해서 확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방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의심하고, 논박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 속에서 진리에 다가가야 합니다. 그렇기에 “진리라는 이름의 왕좌”는 특정한 이론이나 특별한 사상가의 자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는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것입니다.


“진리”라고 불리는 ‘지식의 왕좌’는 인간 지혜와 슬기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식, 혼란 중에 피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