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구조
1장. 지식의 스펙트럼
1장. 지식의 스펙트럼 – 종류와 역할의 다양함
한줄기 태양 빛이 프리즘을 지나면서 무지개로 펼쳐집니다. 빨강으로 시작해서 노랑을 지나 파란색으로 이어지는 무지개의 색은 일곱 색깔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무지개의 색이 일곱 가지로 이해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무지개를 '오색무지개'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오색은 다섯 색, 즉 빨강, 노랑, 파랑, 흰색, 검정을 말합니다. '오방색'이라고도 하지요. 음양오행에서 말하는 오행입니다. 우주의 변화를 다섯 가지 기운으로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무지개를 일곱 색으로 정리한 것은 물리학자 뉴턴입니다. 빛의 성질을 연구하던 뉴턴은 프리즘을 이용하여 빛을 분해하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빛이 다양한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일곱 가지 색깔로 구분하여 기록했습니다. 이는 음악의 7 음계와 연관 지어 설명한 것이라고 합니다. 수십수백, 수억 가지의 색이 모여 아름다운 무지개를 이룹니다. 각각의 색은 저마다 다르지만, 조화 속에 어우러집니다.
실제로 무지개를 보면서 색을 구별해 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무지개의 색은 연속적인 스펙트럼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가진 색수용체도 다르고 또 문화와 언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색을 바라보는 개인의 취향은 있을 수 있지만, 색자체는 옳고 그름의 구별, 잘난 색과 못난 색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식의 모습은 이런 무지개의 스펙트럼 구조와 닮아 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각각의 색깔로 지식을 구별해 봅니다.
빨강은 나면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생존을 위한 지식들”입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생명도 가진 지식입니다.
주황은 “창조와 상상의 지식”을 배치합니다. 때로는 광기로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창조와 예술의 근원입니다. 기존의 틀을 깨고 창조와 혁신의 에너지가 됩니다.
노랑은 살면서 갖게 되는 “실용적인 지식들”입니다. 불을 피우거나 자전거 타는 요령을 배운다거나. 자동차를 운전하는 기술의 지식입니다.
초록은 생명 넘치는 “공동체의 지식”입니다. 문화, 규범, 법률, 상식처럼 인간이 협력하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파랑은 “논리와 추론의 지식”입니다. 수학이나 형이상학처럼 감각 너머의 개념을 탐구하며, 현실을 넘어 추상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함합니다.
남색은 “자연과학의 지식”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지식으로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이롭게 하는 평화로운 지식입니다.
보라색은 “가치와 윤리의 지식”입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가치를 탐구하며, 각 개인에게 삶의 목표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유의 영역이지요. 미학, 윤리학, 윤리적, 종교적 지식입니다.
이러한 분류는 제 느낌으로 분류한 주관적 기준입니다. 색을 부여한다면 그저 주황색. 한 없이 주관적인 제 개인의 느낌인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런 분류를 해보는 것은, 인간의 지식이란 저마다 역할과 기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식의 구분은 실제 우리 삶에 매우 유용한 지혜이고 통찰입니다. 이처럼 지식을 색깔로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지식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하고, 또 얼마나 다양한 가치를 지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다양한 색깔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다운 무지개가 되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책, 특히 1부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이번엔 무지개를 물감으로 그립니다. 그리고 물감이 마르기 전 모든 색을 섞어버립니다. 그러면 모든 색이 섞이고 검정이 되고 맙니다. 빨강 파랑 초록의 빛의 3 원색은 합치면 다시 백색의 밝은 빛이 되지만, 물감으로 그려진 빨강 노랑 파랑, 물감의 삼원색은 반대로 검은색이 됩니다. 이런 차이는 빛과 물감이라는 '재료'의 본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빛은 더해질수록 밝아지는 에너지의 속성을 지녔지만, 물감은 더할수록 빛을 흡수해 어두워지는 특성을 가집니다.
지식을 스펙트럼의 구조로 이해할 때 얻는 가장 큰 유익은 스펙트럼이 겹치거나 경계가 없는 부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식도 영역을 넘나들며 서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한 영역의 지식이 다른 영역을 무시하거나 과도하게 침범할 때 조화가 깨지고 지식은 어두운 위협이 되기 마련인 것이지요.
마치 무지개의 각 색이 본연의 위치에 머무를 때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지만, 무분별하게 모든 색을 섞어버리면 검은빛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일상에서 우리는 ‘과학의 영역’으로 검증해야 할 문제를 뜬금없이 개인적 체험으로만 설명한다거나, ‘윤리와 가치 판단’이 필요한 부분을 ‘수학적 계산’으로 대체해버리려 할 때 큰 혼란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과학의 지식과 종교의 지식이 겹치는 지점에서 ‘지동설’이 위치했습니다. 인류는 오랜 기간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지식’했습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 발전되면서 지동설은 과학의 지식으로 움직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마침내 지동설은 과학의 지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과학의 지식이란 그런 ‘과정을 통해 검증된 지식’이기에 신뢰할만한 지식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학의 지식이 궁극의 지식인 것은 아니지요.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기대를 ‘과학주의’라고 합니다. 때론 과학의 지식도 위험하고 한계를 갖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행한 대학살은 ‘우생학’이라는 과학의 명분을 앞세워 행해졌습니다. 과학주의는 과학의 방법론이 유효한 영역을 넘어서까지 확장하려는 태도입니다. 지식의 역할과 한계를 오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과학의 지식은 반증 가능성을 전제로 한 지식입니다. 귀납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얻어진 지식이기에 언제라도 오류가 될 수 있습니다. 커피가 건강에 좋은지 나쁜지 아닌지, 소금이 해로운지 무해한 지, 아직도 과학은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대표적으로 과학과 종교의 충돌을 이야기했지만, 일상 속에서 많은 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종종 어린아이들은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꿈에서 만난 요정이 아이에게는 현실이 됩니다. 내 개인적인 경험과 과학적 지식을 구별하지 못하면 마늘이 만병통치약이 되기도 합니다.
법과 규범은 명제적으로는 진리가 아닐 수 있지만, 사회적 합의를 통해 모두가 따라야 하는 지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반면,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은 공동체에 적용되지 않을 수 있으나, 개인에게는 절대적일 만큼 중요한 지식으로 작용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과 정보화 시대 속에서 방대한 양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은 동시에 모든 지식을 동일한 수준으로 취급하는 문제를 초래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 생각’이라는 표현 속에 갇혀, 다른 지식의 말에 귀를 닫습니다. 음모론과 과학적 사실이 동일한 무게로 다뤄지고, 개인의 망상이 공공의 진리로 간주되는 현상이 빈번합니다. 지식의 다양한 층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혼란을 초래하며, 사회적 갈등과 신뢰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가짜뉴스가 진실로 둔갑하거나, 특정 이념이나 신념이 과학적 사실로 포장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혼란은 우리가 지식을 제대로 평가하고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해서는 각 영역의 특성과 가치를 이해하고,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유효한지 고민해야 합니다.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판단이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기술일 것입니다. 지식의 다양성과 조화를 이해하고 존중할 때, 현대 정보화 사회의 혼란 속에서도 새로운 방향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겠지요. 무지개가 희망을 상징하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