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안데르탈인의 마지막과 펭귄의 허들링
36장. 함께해야 살아남는다. 종의 슬기와 공동체
어쩌면 네안데르탈인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기품 있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깊은 에메랄드 눈빛과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혹독한 빙하기를 견뎌낸 강인한 존재들. 하지만 ‘종’으로서 네안데르탈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강인했던 그들의 마지막을 상상해 봅니다.
모두가 떠나고 이제 남은 몇몇.
자신들만이 마지막 남은 네안데르탈인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을까?
비통한 슬픔 가늠할 수 없는 절망.
어쩌면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며 뜻을 같이해온 동료.
어쩌면 가족.
하나하나 쓰러져 갈 때, 종말에 대한 두려움.
넷이 셋이 되고, 또 둘이 되고.
떠나는 자의 안타까움, 남은 자의 서글픔.
마침내 혼자가 되어버린 '종의 멸망'.
남은 자의 고통은, 언젠가 그가 늑대에게 물려 손가락이 뜯겨나갔을 때보다, 곰에게 물려 허벅지가 절반이 뜯겼던 그때 보다 더 아프지 않았을까요? 어떤 고통도 희망이 있는 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남은 자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는 단독자. 그저 파도이고 구름이고 돌인 것처럼, 자연의 한 조각일 뿐입니다.
그의 슬픔은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슬픔입니다. 불러줄 이가 없다면 이름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그를 질투하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이조차 사라진 절대의 고독. 그는 모두를 기억해야 했지만, 아무도 그를 기억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혼자 남은 자의 슬픔이 아닐까요?
이 슬픔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생명의 본성에 새겨져 있습니다. 생명의 유전자에는 단지 자신만을 위한 생존 본능만이 아니라,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 함께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어떤 내적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바다를 떠도는 물고기 떼도, 초원을 달리는 초식동물 무리도, 하늘을 나는 철새 떼도 모두 같은 본능을 공유합니다.
단독생활을 하는 숲의 제왕 호랑이도 때가 되면 사랑할 대상을 찾아 나섭니다.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한 존재조차 생명을 잇는 계절 앞에서는 결코 외로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서로를 향해 울부짖고, 흔적을 남기며, 마침내 만나 짝을 이룹니다. 넓은 바다를 헤엄치던 연어도 때가 되면 짝을 찾아 강을 오르고 폭포를 거스르며 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생명이 다할지라도.
이는 생명의 본성이 '연결'과 '만남'이라는 사실을 웅변합니다. 생명이란 본디, '함께 있음'을 통해 수억 년의 시간을 견뎌온 존재입니다. 함께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고, 함께했기에 더 멀리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생명 안에는 다른 생명을 돕고자 하는 본성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타성"은 단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전략이었으며, 종을 넘어선 생명의 보편 슬기였습니다.
펭귄의 ‘허들링(Huddling)’은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생명의 슬기를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깊은 밤, 오직 하늘과 눈과 얼음뿐인 그곳에 서로의 몸에 바싹 붙어 빽빽하게 모여듭니다. 바깥쪽에 있는 펭귄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안쪽에 있는 펭귄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따뜻함을 나눕니다.
바깥쪽 펭귄들은 시간이 지나면 안쪽으로 이동하고, 안쪽에 있던 펭귄들은 바깥쪽으로 나가 추위를 견디는 자리를 기꺼이 자청합니다. 이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모든 펭귄은 온기를 유지하고, 결국 혹독한 환경을 함께 이겨냅니다. 죽음에 이를 추위도 공동체의 연대 앞에서는 생존의 희망으로 바뀝니다. 허들링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희생하며 함께 살아남는 공동체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를 보여줍니다.
어린 시절, 만화 속 슈퍼영웅을 꿈꾸었습니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그런 슈퍼 히어로들이 악당을 물리칠 때의 모습도 즐거웠지만, 더 좋아했던 것은 누군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돕는 장면이었습니다. 테러를 당해 달리는 열차를 멈추기 위해 어쩌면 몸이 찢길 것 같은 고통을 피하지 않고 많은 이들을 구하는 스파이더맨의 모습. 생명을 잃은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지구를 돌아 시간을 되돌려 살려내던 슈퍼맨의 모습.
영웅 서사에 있어서 선과 악은 비교적 단순하게 구분됩니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 등장하면 빌런,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면 슈퍼히어로입니다. 물론 그 지점을 흔드는 작품들도 종종 등장하곤 하지만요. 어쨌든 다른 이들, 다른 생명을, 어려움을 당한 이들을 돕고 싶어 하는 본성이 생명 우리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웅덩이에 빠진 코끼리를 구해내는 마을 사람들의 영상. 얼음이 깨진 호수에 개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드는 이의 영상에 우리가 감동하고 감격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슈퍼 히어로를 꿈꾸었던 어쩌면 그때는 몰랐던 이면의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혼자라는 점입니다. 많은 영웅은 늘 혼자입니다. 배트맨도, 슈퍼맨도, 스파이더맨도,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갑니다. 그들은 세상과 어긋납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지 못합니다. 가면 뒤의 고독은 영웅 신화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어쩌면 함께 살아가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그들의 모습에 오히려 위로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실은 슈퍼 파워 같은 것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궁극의 진리 그런 것도 별 의미 없다 싶습니다. 우주의 창조 원리가 무엇인지,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조금 궁금하기는 하겠지만). 실제로 인간이 진리를 묻게 될 때는 거의 다 공동체 안에서의 느끼는 어려움 때문이지 않은가요?
정말로 삶이 힘들다 느껴질 때는, 거의 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입니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 혼자라는 고립감. 사소한 일로 인한 갈등들. 오해들. 어떤 이들은 사람을 피해 자연 안의 삶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저 모든 이들과 사이좋게 갈등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 주며 사는 삶. 그게 왜 이리 어려운 건가요? 포스트모던의 시대, 우리에게는 “나”만 남아있고, “우리”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가요? 내 이유, 내 감정, 나의 소중함이 커진 만큼, 어쩌면 우리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 버린 것은 아닌지. 어느 사이 그것이 정상이라고 오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함께 산다는 것,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저의 출발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온 우주의 중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내 삶의 절반을 내어주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되었을 때, 아이들이 태어났고, 그만큼 저는 작아져갔습니다. 그래도 알 수 없는 행복감이 벅차올랐습니다. 아버지로 사는 일이 좋고 즐겁기만 하지는 않았겠지요. 실패도 하고 갈등도 하고. 지나치듯 어디선가 읽었던 어떤 엄마의 글이 떠오릅니다. “미안해,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야”, 말은 못 해도 틀림없이 아빠들도 같은 마음일 겁니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보내온 순간들이 쌓여, 어느새 우린 가족으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길어졌습니다. 아내와 나를 섞어 닮은 아이들은 어쩌면 내 삶보다 더 귀한 생명들입니다. 아주 가끔 남편이라는 자리는 위태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아내는 내가 늙고 병들어도 버리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아이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나의 자리는 우주에서 제일 견고합니다. 그래서 천륜이라고 한다지요.
우리가 '슈퍼 히어로'의 고독에 공감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비로소 '나'를 넘어선 '우리'를 발견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본성적으로 '연결'과 '공동체'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강요된 당위가 아니라, 수억 년 생명의 역사 속에서 체득된 '생명의 진리'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지 않을까요?
1967년, 세계 최초의 위성 생중계 방송 ‘Our World’에 네 명의 젊은이들이 등장했습니다. 전 세계가 같은 시간에 함께 연결되었던 그 순간, 비틀스가 노래했습니다. “All You Need Is Love.”당신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라고.
Love, Live, life. 이 세 단어가 서로를 닮아 있듯이 사랑, 삶, 사람, 한국어의 이 세 단어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온전해지며, 우리의 인생 또한 서로의 관계 속에서 참된 의미를 드러낸다는 것. 때로는 힘들어도 분명한 것은 우리는 공동체의 사랑을 통해 비로소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