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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장. '지금'이라는 멋진 환상

종의 진리

by 결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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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니니까, 제가 보았던 어린 시절의 밤하늘과 지금의 밤하늘은 달라진 것이 없겠지요. 틀림없이 같은 하늘을 보는 경험이지만, 제 안의 인식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하늘의 이치를 따라 고요하고 단정하게 보이던 그 하늘이 이젠 한없이 기묘해 보입니다. 그건 ‘지금’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 보던 밤하늘은 그저 빛나는 달과 반짝이는 별만 봐도 좋았습니다. 어쩌다 별 사이를 가르며 지나가는 별똥별만 봐도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같이 있던 친구나 형제들을 향해 "별똥별이야"를 외치면 그 순간 꼬리가 사라지기 전에 소원을 외쳐야 했지요. 채 소원을 떠올리기도 전에, 금세 사라져 버리면 아쉽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곧 '지금'의 우주라고 믿었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빛도 속도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모든 천체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은 아닌 것이지요. 빛나는 목성은 대략 43분 전의 모습입니다. 가장 가까운 별이라는 프록시마 센타우리조차 4.2광년 떨어져 있으니 4.2년 전의 모습이고, 은하 중에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은하의 모습은 무려 250만 년 전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별똥별이야”라고 외쳤던 그때에 무엇에게 빌었던 것인가요? 어쩌면 그때는 이미 사라져 버린 별의 흔적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130억 년을 달려온 초기 빅뱅의 흔적들과 지구 옆을 스치는 어젯밤의 혜성이 같은 하늘에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각각의 다양한 천체들을 각각 언제의 빛인지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인간의 의식은 그 빛을 ‘하나의 밤하늘 장면’으로, 동시적인 경험으로 재구성합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우주는 사실 '빅뱅' 이후 모든 시간의 장면들이 동시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시간의 사진첩' 같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별들의 시간들이 얽혀 나타나는 ‘지금’이란, 우리 인간종이 만든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실제로 있을 우주와 우리가 경험하는 우주는 다른 모습입니다. 3차원의 존재인 인간에게 '시간'이란 늘 미래에서 와 현재를 지나 그리고 과거로만 흐르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데 얽힌 모습이란 애초에 환상입니다. 마치 오래된 공포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유령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기의 사연을 가지고 주인공 앞에 등장하지만, 유령끼리는 서로 인식하지 못하는 장면. 제가 밤하늘을 바라볼 때 느끼는 기묘함이란 그런 것이지요.



‘지금’이라는 양상의 기묘함은 밤하늘에서만 펼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20세기 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지요.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해서, 시간의 흐름이 관찰자의 ‘속도’나 ‘중력’의 크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혁명적인 통찰을 내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우리 몸을 이루는 머리와 발의 시간도 다릅니다. 머리는 상대적으로 지구 중심부에서 멀어 중력이 미세하게나마 약합니다. 중력이 약한 곳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흐릅니다. 머리의 시간은 빠르게 흐릅니다. 상대적으로 발은 머리보다 지구 중심에 가깝기에, 보다 강한 중력장에 위치한 발은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이지요.

이 차이를 현재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정밀한 시계를 가지고 측정해 보면, 하루에 약 90 나노초(1 나노초는 10억 분의 1초)에 달한다고 합니다. 고층 아파트에 살면 노화도 그만큼 빠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50층과 1층에 사는 사람이 30년 후에는 약 0.000986초 차이이니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지만요. 실제로 내비게이션에 사용되는 GPS 위성도 중력과 속도에 따른 시간 왜곡을 보정하지 않으면 하루에 10km 이상 위치 오차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옳았습니다. 시간이란 상대적이었습니다. 아파트 50층 아파트 꼭대기에 사는 이의 지금은, 1층에 사는 사람의 ‘미래’입니다. 1층 사는 사람의 지금은, 50층 사는 사람의 ‘과거’입니다. 우리가 지금이라고 느끼는 시간의 순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다 얽혀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우주의 절대 질서로 여겨지던 ‘시간’의 지위에 본격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칸트’였습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 외부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시간이 인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선험적 형식(a priori forms of intuition)”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대상을 경험할 때 필연적으로 사용하는 틀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방에 처음 들어갑니다. 그럼 경험하는 것은 새로운 방의 데이터들입니다. 온도, 벽지 색깔, 향기, 소리, 테이블의 모양. 방을 이루는 수많은 데이터가 오감을 통해 쏟아져옵니다. 이 수많은 데이터 중 의식이 포획하는 대상만이 비로소 우리 인식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칸트의 이런 사유는 마치 우주의 중심을 지구로 인식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우주관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뒤집힌 것에 버금가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인간 인식 외부에 있던 시간의 존재가 인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도 칸트라는 토양 위에 맺은 결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인간은 단순히 자극에 반응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 인식의 구조를 성찰하고, 스스로 세계를 구성해 가는 능동적 존재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계를 구성합니다. 그렇기에 똑같은 샘물을 마셔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고 비유하는 것이지요. 동일한 환경이 주어진다고 해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세상이 달리 구성되고 경험도 달라집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일란성쌍둥이조차, 어떤 이는 경찰이 되고 어떤 이는 범죄자가 되기도 하지요.


'지금'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 철학적 탐구의 대상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루이스 멈포드 같은 사회학자들은 "시간이란 도시의 발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곧 권력이었다는 날카로운 통찰도 함께 제시했습니다. 산업화 이전에는 해와 달, 계절의 변화에 따라 시간이 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도로 조직화된 도시 생활과 산업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점차 표준화된 시간에 맞춰 생산하고, 소비하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근대 도시의 중앙에 거대한 시계탑이 세워지면서 저마다의 시간이, 정각이라는 합의로 인간의 관측세계, 곧 경험세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멈포드에 따르면 '시계'가 '증기기관'보다 더 핵심기계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시간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능력은 곧 생산성과 질서를 규율하는 강력한 권력이 되었지요. 우리 한국인의 시간 역시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 서구 중심의 '극동의 시간', '변방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이 없어 불만은 없지만, 이는 ‘지금’이라는 시간이 사회적 "약속"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한 인간의 탄생은 한 ‘지금’의 탄생입니다. 영겁의 시간 속에 깜빡이는 불빛처럼 수많은 인생들이 찰나의 시간을 존재했다가 사라져 갑니다. '우리'란 '지금'을 공유하는 이들을 뜻하는 벅찬 이름입니다. “우리”가 되어 함께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영원의 시간 속에 주어진 아름다운 환상입니다. 저마다에게 주어진 각자의 ‘지금’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합의하고 공유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의 약속이 인류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복잡한 사회를 이루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며 문명을 발전시키는 모든 것이 '지금'이라는 약속 위에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는 약속이야말로 인류 종(種)을 유지하고 번성하게 하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진리, 즉 "종의 진리"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오직 ‘지금’만이 나의 시간입니다. 과거는 흐릿한 기억으로 남은 ‘지금’이고,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지금’ 아닌가요?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이룬 것처럼, 나의 지금이 곧 나의 미래입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를 분리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싶습니다.

때로 인생은 실패와 고난, 고독의 구간을 지나기도 합니다. 의미 없는 날들, 그냥 지나기만을 바라는 날들이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견디는 것만으로 훌륭한 날들이 있습니다. ‘거꾸로 매달려도 국방부 시계는 흐른다’라는 말이 위로가 되던 때를 기억합니다. 지금의 내가 빚을 지면 미래의 내가 갚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실제로 종종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합니다. 망각이라는 오래된 친구가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어제의 실패 때문에 미래의 내가 실패한 인생일리는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좋은 사람이면,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이 오늘 하루 위대하게 보낸다면, 당신의 생은 틀림없이 위대한 생인 것이지요.

미래는 늘어진 지금입니다. 지금 멋집시다.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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