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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직업

작명에서부터 시작된 여정

by 결휘


104 인류 최초의 직업: 이름 짓기에서 시작된 여정

오래된 히브리 전통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직업은 “작명가”라고 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은 아담을 창조한 후, 그를 이끌어 다른 동물들에게 인도했다. 아담이 생물들을 보며 부르는 것이 곧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인류의 기원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그때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모든 창조물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창조된 아담. 이제 막 삶을 시작한 그에게 있어 세계는 그저 ‘자연(스스로 있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거기 그렇게 있었습니다. 사실은 아담조차 그저 자연이었지요. 빛나는 태양, 스치는 바람, 꽃의 향기들과 지저귀는 새의 소리들 그 모든 것은 어우러지고 그 자체로 하나였습니다.

신의 인도함을 받은 아담은 자연 가운데 만나고 경험하면서, 그런 경험들을 모아 종합하고 특징들을 파악합니다. 그의 슬기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하여 정보를 갖게 되는데, 오늘 우리는 그 과정을 “개념화”라고 부릅니다.


개념은 다양한 경험과 학습을 통해 형성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직접적인 경험 ( 사과를 먹어보고 빨갛고 둥글며 달콤한 맛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됨)이나 간접적인 경험 (책이나 TV를 통해 사과에 대해 배우는 것)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으로서의 세계를 이해하고 조직화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태초의 이야기는 아담의 ‘이름 짓기’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자연 가운데 특별한 존재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치 오래된 사진 속에 당신의 아기 모습이 남겨져 있는 것처럼, 인류는 첫 사람 아담 모습을 이야기 속에 남겨 첫 슬기인간, 호모사피엔스의 기억을 보존해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구조화하며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대상을 부른다는 의미를 넘어서 아담과의 관계 가운데 이제 ‘의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주어지면, 그 대상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이제 인간의 경험 세계 속으로 들어옵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이름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때론 한 줄 시가 책 한 권의 언어보다 더 많은 깨달음을 주는 것이지요.


개념은 이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의 역할을 합니다. ‘어떤 문화권’에 사느냐에 따라 어떤 개념에 대한 단어가 없거나 다르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언어가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달라집니다. 북극지방에 사는 이누이트 족의 언어에는 ‘눈(snow)을’ 표현하는 단어가 수십 개가 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생활환경이 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일부 열대 지역 언어에서는 "눈"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다.

우리말의 ‘한 맺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억울하다’는 표현이 다른 나라에는 없다고 합니다. 뜨거운 열탕에 몸을 담그며 '시원하다'라고 하는 것도 한국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어쩌면 한 맺히고 억울하고, 서글픈 역사를 가졌기에 어쩌면 한국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다른 민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보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언어는 환경과 문화를 반영하며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 영향을 줍니다.


개념이 언어가 됩니다. 개념화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인간의 언어는 유용하지만, 동시에 한계를 갖습니다. ‘꽃’이라는 이름은 꽃처럼 예쁘지만 향기는 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단어가 결코 사랑일 수 없습니다. 같은 사실(사태)을 경험해도 저마다 다른 개념들을 갖기 마련입니다. 어려서 개에 물렸던 저는 아직도 큰 개가 다가오면 무섭습니다. 그 두려움은 인간의 언어로 전할 수 없지요. 호랑이는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큰 ‘개’는 여전히 곤란합니다. 개에 대한 저의 개념은 누군가의 그것과 분명히 다른 어떤 것일 겁니다.


또한 인간의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같은 단어라도 사용되는 환경과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십상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사용되는 환경과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곤합니다. ‘개념’이라는 용어 자체도 그런 숙명을 피하지 못합니다.

개념이라는 말의 처음이 인식의 과정을 설명하는 기술적 용어였다면, 언젠가부터 윤리와 규범의 의미도 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념 있는 사람' "개념 없는 인간"과 같은 표현들이 사용되고 익숙해졌습니다. 요즘은 "개념"을 중립적 기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감정을 얹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개념이 있냐?'는 물음이 싸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어의 ‘Concept(콘셉트, 개념)’과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은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들로 언어란 '진리를 탐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에는 마땅치 않은 수단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고 혼란을 주기 마련입니다. 말이 많아질수록,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오히려 갈등이 분란이 심해지는 것도 말이란 워낙에나 그런 것이기 때문인 거죠.


그렇지만, 언어는 비록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인류의 가장 오래된 도구이자 여전히 필수적인 지식의 수단입니다. 언어는 진리를 규명하기에는 부족할지 몰라도, 인간이 끊임없이 진리로 향하는 여정을 가능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발명입니다. 그렇기에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되, 이를 통해 새로운 지식과 통찰을 얻으려는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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