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근심어린 시선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흔히 소크라테스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라고 한탄했다지만, 실제로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명확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 지금으로부터 43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기록 속에 비슷한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인내심이 없고, 예의범절이 부족하며, 무례하고 게으르다. 과거의 미덕을 잃었다.” 고위 관료였던 프타호텝(Ptahhotep)이 쓴 <프타호텝의 가르침>이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Seneca)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이제 자제심이 없다. 그들은 방종과 쾌락에 빠져 선조의 덕을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 이쯤 되면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시각은 수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왜 이러한 세대 간의 인식 차이와 갈등이 반복되는 걸까요?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그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규범과 가치, 그리고 앞 장에서 다룬 권위가 무너지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세대 갈등은 때로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습니다. 물론 자산 격차와 같은 경제적 문제, 고령화로 인한 복지 부담 갈등, 정치적 견해 차이 등 여러 현실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갈등은 지식의 양상에서 나오는 차이입니다. 본 장에서는 청년세대와 기성세대의 지식의 습득과 활용하는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피하지 말고 부딪치고 갈등하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지만, 오해와 무지로 인한 의미 없는 갈등은 서로를 이해함으로 사라질 수 있기도 하니까요.
인식론이라는 철학의 분야가 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는가?’, ‘인식된 세상은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와 같은 물음을 주제로 다루는 학문의 분야입니다. ‘개념’과 ‘관념’은 인간 인식을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청년 세대의 지식의 모습은 ‘개념적 사고’입니다. 기성세대의 사고는 ‘관념적 사고’의 특징을 갖습니다.
<개념>이란, 앞서 ‘최초의 직업’이라는 장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이 자연을 경험하며 갖게 되는 최초의 지식입니다. 빨갛고 달콤하고 아삭하는 맛있는 무엇인가를 경험한 후 그 경험들을 모아 특징들을 파악합니다. 그 결과 얻어진 인식의 결과가 ‘사과’라는 개념입니다.
<관념>이란 그 개념이 삶을 통해서 확장되어 가는 이후 갖는 지식입니다. 개념 속에 사과는 빨간 사과였습니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초록색 사과(아오리 등)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노란 사과(황금사과 등)도 경험하게 됩니다. 나아가 '사과'는 특정 추억, 고향, 혹은 '뉴턴의 사과'처럼 상징적인 의미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관념입니다.
인간의 슬기가 가진 탁월한 능력은 무엇보다 개념화된 정보를 ‘학습’을 통해 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개념화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기록이 되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넘나들 수 있습니다. 수천 년 전 인류가 남긴 기록의 내용은 그날이나, 오늘날에나 다르지 않습니다. 글이 남겨진 토판이나, 파피루스나 거북이 등껍질은 깨어지고 낡아졌더라도 정보는 그대로 남습니다.
그렇지만 의미와 해석은 그 때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개념들이 불러일으키는 의미와 해석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과 맥락 속에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후대의 우리가 기록자가 당시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더 깊은 의미와 가치를 새로운 맥락적 이해를 통해 더 풍부하고 때로는 원저자보다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개념적 사고는 본문(text)에 충실한 사고입니다. 보다 “정의적(定義的, definitional)"입니다. 관념적 사고는 해석적입니다. 보다 “맥락적(脈絡的, contextual)입니다. 젊은 사람이 ‘정의’에 대해 배운다면, 사전에 나온 정의나 이론으로서의 정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지식은 객관적이기에 옳고 그름의 기준이 비교적 분명하게 세워집니다. 젊은이들은 배운 바를 토대로 “이건 옳다, 저건 그르다”라고 선을 긋기 쉽습니다. 명확한 답을 찾고자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새로운 개념을 빠르게 습득하고 그 개념에 비추어 현실을 판단하려 합니다. 이는 젊음의 열정과 이상주의와도 맞닿아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기성세대의 모습은 많은 부분 삶을 살아오면서 몸으로 체득한 경험적 지식입니다. 그들이 경험한 현실이란 흑백으로 나눌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때로는 선(善)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악(惡)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악인 줄 알았던 사람이나 행동이 알고 보니 나의 오해였거나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깨닫는 경우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점점 더 답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는 정의라는 개념을 몰라서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딜레마와 상황 속에서 부딪치며 배운 맥락적 통찰들로 인해 정의에 대한 단순했던 관념이 더욱 복잡하고 심오하게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우월하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젊은 세대의 지식은 이론적 틀과 보편법칙에 가까워 분명하고 직선적인 반면에, 기성세대의 지혜는 경험의 이야기로부터 나와 유연하고 곡선적입니다. 젊은 그들이 것이 새하얀 도화지에 그린 선명한 그림이라면, 기성세대의 그것은 여러 색이 겹쳐진 수채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간 속에 살아가기에 각 세대는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세대 간의 차이가 곧바로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갈등은 이런 서로의 다름을 깨닫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할 때 나타납니다.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를 향해 “왜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생각하세요? 원칙대로 하면 될 것을, 어른들은 말이 너무 길어”라고 한다면, 반대로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을 향해 “세상 물정 모르고 너무 쉽게 판단한다”며 가볍게 여길 때, 갈등이 됩니다. 서로 자기 틀에 상대를 끼워 맞추려다 보니 오해가 생깁니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관념화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도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었습니다. 어떤 개념들은 지나치게 관념화되어 버렸습니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언제라도 저를 울게 만드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내’라는 말에도 이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들이 담겼습니다. 눈물나도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그게 저의 삶 또 우리들 저마다의 삶이었던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너무 관념화된 언어는 소통하기가 어렵습니다. 관념화된 언어 속에 스스로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늘 삼가는 마음을 갖습니다.
기성세대는 늘 흐르는 시간 속을 지나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날 푸릇한 개념의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용감하게도 살아보려, 정의롭게도 살아보려 했더랬지요. 그렇지만 사실 늘 정의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때론 혹독한 시대에 두려워하기도 하고, 비겁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 치열했던 시간들도 세월 속에 다 지나버렸습니다. 지난날의 경험은 그날들의 경험이었을 뿐입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를 담보하지 못합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주어진 날들, 저들이 살아갈 새로운 날들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자칫 나의 옹졸한 경험이 저들의 삶에 묻어나지 않기를 늘 소망합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젊은 세대의 모습은 기성세대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웃세대 어른들에게 배운 것으로 우리의 시대를 살아온 것처럼, 저들도 우리가 가르치고 전해준 것으로 저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설픔과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가 삶을 견디고 배우며 살아온 것처럼, 젊은 세대 또한 그럴 것입니다. 젊은 세대의 미숙함에 놀라지 맙시다. 시행착오는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명이 가진 근원적 전략입니다. 원숭이도 쥐도 아메바까지도, 모든 생명은 시행착오를 통해 답을 찾아갑니다. 시행착오가 이 지구별을 생명이 넘치는 기적의 별로 아름답게 했습니다.
젊은 세대에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입니다. 개념적 사고는 메마르고 건조한 만큼 깨어지기 쉽습니다. 저마다의 삶 속에 각자의 맥락이 있습니다. 언제나 세상은 개념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입니다. 기성세대의 관념적 언어가 소통하기 어렵다면, 젊은 세대의 언어는 지루하기 십상입니다.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만큼 젊은 세대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입니다. 젊은 세대도 기성세대의 생각과 마음을 헤아리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때로 개념적 사고는 나침반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기성세대가 오래전 떠나온 그 자리를 잊고 방향을 잃을 때, 청년의 목소리가 공동체가 나아갈 곳을 밝히곤 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기성세대가 힘써 그들에게 전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관념적 사고와 개념적 사고는 서로 갈등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둘처럼 보이는 하나인 것이지요.
어떤 가수가 부른 노랫말이 매력적입니다. “너 늙어 봤냐, 나 젊어 봤다” 단 한번 얼핏 들은 노랫말이었지만, 기억에 새겨졌습니다. 사실 경험의 지식은 언어로 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살면서 더더욱 모르겠다 싶은 경우도 있습니다. 알고도 말하지 못할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어떤 일들은 순간의 사건이었지만, 평생을 이야기해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설령 좀 이상한 이야기,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가 살아온 인생이 악한 것이 아니었다면, 분명 귀를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제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창백한 개념이 날마다 부서지고 터지면서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 갑니다.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갖게 되는 진짜 지식, 자신만의 이야기. 그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부릅니다.
세대 간 지식의 차이는 인류 지혜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룹니다. 만약 모두가 똑같은 생각과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사회는 발전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겠지요. 어른들의 관념적 지식 속에는 오랜 시행착오의 지혜가 들어있고, 젊은이들의 개념적 지식 속에는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관념이 낡은 것은 아닌지 성찰하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관념 속에 담긴 경험의 지혜를 배우려 노력할 때, 비로소 세대를 잇는 슬기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