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에 있어서 ‘나’란 곧 이름이었습니다. ‘정(鄭’)이라는 저의 성을 좋아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성씨이기에 별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또 자녀들을 키우면서 점점 제 삶의 이름은 의미가 작아지고, 성이 점차 의미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제 안에 나의 부모님의 삶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흐름은 저의 아이들에게도 이어집니다. 아이들의 모습 속에 아내와 저의 모습들이 스칩니다. 겉모습만이 아닙니다. 아내와 나의 삶의 흔적들도 보입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이라는 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봅니다.
몸의 생명이 DNA로 전해지듯이, 삶의 흔적들 곧 슬기는 ‘교육’으로 전해집니다. 교육이라는 주제는 우리들 슬기인간의 삶의 가장 큰 주제입니다. 인생의 전반부를 배움으로 시작하고, 성인이 된 후에는 잘 가르치는 것이 사명이 됩니다. 가르침 삶이란 꼭 자녀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자신이 쌓아온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것도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속시키는 가장 의미 있는 방식입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는 ‘헬리콥터 부모’라는 말이 익숙해졌습니다. 아이의 주변을 헬리콥터처럼 맴돌며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 결정해주는 부모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원래 아이들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 엄마들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일본에서는 교육마마 (教育ママ, 쿄이쿠마마)라는 용어가 60년대부터 등장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는 엄마를 두고 ‘치맛바람’이라 불렀습니다.
용어는 달라도 그 본질은 같습니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아이의 삶에 너무 깊이 개입하여 스스로 설 기회를 빼앗아버리는 것입니다. 숙제는 물론이고, 친구 관계, 심지어는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꿈꿔야 하는지 그 주제까지 골라주려 합니다. 이런 모습에 저는 종종 서늘한 질문과 마주하곤 합니다. 우리의 이 지극한 사랑이, 혹시 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힘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이들은 언젠가 반드시 떠나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 부모의 품을 떠나야 할 때, 그동안 미뤄왔던 모든 과제가 한꺼번에 폭발합니다. 스스로 밥을 챙겨 먹는 사소한 일부터, 직장을 구하고, 관계를 맺고,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거대한 일까지, 제대로 혼자 해본 적 없는 과제들 앞에서 아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집니다. 안전하게만 자란 아이, 혼자서 길을 나서본 적이 없는 아이는, 인생의 입구에서만 서성이다 주저앉고 마는 것입니다.
미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예측 불가능합니다. 빌 게이츠가 하버드 학생이었을 때, “나는 장차 MS-DOS라는 운영체제를 만들어 마이크로소프트라는 거대한 회사를 세우고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거야”라는 꿈을 꾸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그저 눈앞의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에 빠져 있었고, 때마침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슬램덩크> 만화를 그린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일본에서 농구가 인기 없던 시절부터 묵묵히 농구 만화만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다 마이클 조던의 등장으로 전 세계적인 농구 붐이 일자, 그의 오랜 열정과 노력이 비로소 빛을 보며 시대의 아이콘이 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완벽하게 짜인 인생 계획표가 아니라, 어떤 파도가 닥쳐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기본적인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실패의 경험’입니다. 삶은 과정이고, 우리는 실패를 통해 배웁니다.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이 아니라, 성공으로 가는 길 위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이 가장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빼앗고 있습니다. 아이가 넘어질까 봐 미리 손을 내밀고,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미리 가시밭길을 치워버립니다. 실패는 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옵니다. 인생은 객관식 시험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정답을 외우게 해도, 아이들은 결국 교과서에 없는 문제와 마주하게 될 겁니다.
그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정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해답을 만들어나가는 용기와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와 지혜는 오직 실패하고, 아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진짜 자기 꿈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꿈이란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걷다 ‘만나는 것’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한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이 ‘아이보다 딱 하루만 더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하루는 자신의 삶을 위한 하루가 아니라, 내가 떠난 뒤에도 아이가 괜찮을지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싶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사랑의 시간일 겁니다. 어쩌면 마음껏 실패해도 버텨줄 부모가 뒤에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가, 진정 행복한 아이가 아닐까요?
진정한 교육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늘 돌아보고 반론을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이것만은 너무나 분명하게 ‘나 없이도 잘살도록’입니다. 아이를 우리 품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은 사랑이지만, 결국 그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은 아이의 뒷모습을 믿고 보내는 순간입니다. 새가 둥지를 떠나 날개를 펴듯, 나무가 뿌리에서 멀리 가지를 뻗듯, 자녀는 언젠가 우리 없이도 자기 길을 살아내야 합니다.
교육은 바로 그날을 준비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