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텅 빈 우주: 끝나지 않는 이야기

by 결휘


늦은 밤. 도시의 거리를 가다가 빌딩사이로 보게 되는 ‘목성’은 순간 제 마음을 들뜨게 만듭니다. 옆에 누구라도 있으면 상기된 목소리로 알려줍니다. “저기 봐 목성이야”. 어떤 이들은 반신반의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런 저를 뭔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목성을 보는 제 마음은 마치 산 정상에 올랐을 때 느끼는 감상과 닮아있습니다. 쳇바퀴 도는 일상에, 잠시 잊고 있던 우주와 그 안의 ‘나’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뭐, 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나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별이란 늘 잘 보이지 않고 구별하기 곤란한 것이기 마련입니다. 중학교 때 <별자리 이야기>라는 책을 보고 별자리를 외우려 한동안 애썼던 기억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내 도시의 밤이 너무 밝아, 별을 본다는 게 도무지 어려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사실은, 목성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도시의 밤하늘에 특별히 빛나는 커다란 별이 보인다면 거의 대부분 목성이기 십상입니다. 물론 모든 별 중에 가장 빛나는 별은 샛별, 곧 금성입니다. 그렇지만 금성은 내성(안쪽별)입니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태양의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초저녁이나 새벽녘에나 볼 수 있는 별이지요. 게다가 금성은 대개 노란색을 띠고 있어서 어렵잖게 구별이 됩니다.


이렇듯 제게는 반갑고 정겨운 별인데, 어떤 이들은 ‘목성 공포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목성 공포증은 실제 정신의학 공식 진단명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일종의 거대공포증(Megalophobia)의 일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메갈로포비아는 거대한 사물이나 풍경, 또는 거대한 스케일의 개념에 대해 지나친 공포를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어쩌면 목성은 그럴만한 별입니다. 일단 태양계의 천체들 가운데 규모에 있어서 압도적입니다. 목성은 태양계 행성 중 가장 큽니다. 부피가 지구의 약 1300배가 넘습니다. 목성 하나가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 전부를 합친 것보다 2배 이상 무겁습니다.

이런 목성은 단단한 지반이 존재하지 않는 가스행성입니다. 그래서 대기는 늘 거대한 폭풍이 일고 있습니다. 목성에서 관찰되는 대적점(大赤點, Great Red Spot)은 관측된 지 350여 년이 지난 거대한 폭풍입니다. 과거에는 지구 3개가 들어갈 만큼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대적점 안에 몰아치는 시속 수백 킬로가 넘는 바람을 생각할 때,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그렇지만, 그런 목성이라 할지라도 태양의 크기를 떠올리면 순식간에 귀여운 모습이 됩니다. 태양은 목성 약 1,000개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규모이니까요. 태양아래 살면서 목성에 대한 공포증을 갖는 경우에 제가 잘 동감되지는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도 밤하늘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는 지점이 있습니다. 천문학자처럼 멋지게 표현하면 “우주 희박성 Cosmic Sparsity”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빈 공간이 너무 많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나 많은 별들과 은하들, 그리고 성간 물질로 가득 차 있는 우주이지만, 압도적 분량으로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빈 공간’입니다.

물론 물리학자들은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암흑물질(약 27%), 암흑에너지(68%), 그리고 아직 발견 못한 다른 물질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우주는 압도적 빈공간입니다. 태양계를 벗어나 가장 가까운 별, ‘프록시마 센터우리’가 4광년이 넘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별과 별 사이, 은하와 은하 사이의 대부분은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텅 빈 여백인 것이지요.

텅 빈 공간은 물질을 이루는 원자 안에도 존재합니다. 원자를 이루는 대부분도, ‘빈 공간”입니다. 만약 원자의 핵을 축구공만 하게 확대해서 서울광장 한 중간에 둔다면, 핵을 도는 전자는 수원시내 어딘가를 떠도는 먼지 크기와 같습니다. 수치로 환산하면, 우리 몸의 99.9999999% 이상은 텅 빈 공간인 것이지요. 이쯤 되면 우리 몸이 벽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신기합니다. 대지 위에 서있을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기적인 셈입니다. 물론 벽을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물리적 이유들은 밝혀져 있지만요.


어쨌든 이러한 ‘공(空)’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인류가 가진 우주관에 도전합니다. 우리는 종종 효율과 목적을 기준으로 사물을 인식하지만, 우주는 그러한 기대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이는 인간 중심의 시각을 내려놓고, 존재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받아들이게 하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진리, ‘궁극의 진리’란 애초에 이름만 있을 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유니콘처럼? 언어로 구성할 수는 있지만, 실재하지는 않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Śūnyatā)’은 단순한 허무(Nihilism)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가 아예 없다는 극단적인 부정이 아니라,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기에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無自性)는 깊은 통찰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 한 그루조차 그 자체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햇빛, 물, 흙, 공기, 시간과 같은 무수한 조건들이 서로 얽혀 잠시 그 모습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라 부릅니다. 모든 것이 다른 것에 기대어 일어나기에, 그 자체의 고정된 본성은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도 진공과 공간은 더 이상 단순히 '비어 있지 않습니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공간이란 겉보기에는 비어있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입자와 반입자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양자 요동(Quantum Fluctuation)으로 가득 찬, 에너지의 바다이자 동적인 매질입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공간은 질량과 에너지에 의해 휘어지고 우주와 함께 팽창하는 능동적인 실체입니다. 심지어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조차 단단한 알갱이처럼 실체로 꽉 차 있지 않고, 양자적 확률과 서로 얽힌 관계, 그리고 에너지의 장으로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불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를 ‘텅 비어 있으나, 동시에 무한한 관계로 가득한 곳’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공(空)은 존재의 부정이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열린 조건이자 가능성의 장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고정된 본질을 찾으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모든 것이 서로의 인연으로 잠시 드러나고 사라지는 그 역동적인 과정 자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깊은 존재론적 의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진리란 고정된 명제가 아니라, 우리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내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유니콘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인간은 언제나 그것을 상상했고, 믿었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왔습니다. 그 믿음과 이야기의 연속이 바로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지켜온 '진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의 세계는 독일의 소설가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대표작 <끝없는 이야기>(Die unendliche Geschichte, 영어 제목: The Neverending Story)에 나오는 세계와 매우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84년에 영화화되었는데 ‘리말(Limahl)’이 부른 동명 주제가가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소설은 몰라도 노래를 들으시면 누구나 익숙하게 느끼실 곡입니다.

소설에는 '판타지아(Fantastica)'라는 환상의 세계가 등장하는데, 이곳은 인간 세계의 '상상력'과 '이야기'에 의해 존재하고 유지되는 곳입니다. 판타지아는 인간의 꿈과 상상, 이야기가 풍부할수록 생명력을 얻고 번성하지만, 인간이 상상하기를 멈추고 현실에만 매몰될수록 '허무(The Nothing)'라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잠식당하고 지워져 갑니다.

주인공인 ‘바스티안’은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되고, 나중에는 책 속으로 들어가 판타지아를 구원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판타지아에서는 바스티안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마법 같은 힘을 얻게 됩니다. 그가 소원을 빌면 새로운 존재가 생겨나고, 그의 상상에 따라 풍경이 바뀌기도 합니다. 바스티안이 판타지아에서 얻는 힘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은유인 것이지요.


바스티안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세바스티안(Sebastian)”, 곧 ‘존귀한 자’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아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생각과 태도는 세상을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가 찾는 진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잇는 힘인지도 모릅니다. 생명을 이어가고, 공동체를 지키고, 낯선 이를 상상하는 그 마음. 바로 그 마음이 텅 빈 우주 속에서도 우리가 꺼지지 않는 이유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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