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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Mar 15. 2024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귀를 스쳐

#1.

그녀의 눈은...

흐리지만 깊어서

동그랗지만 슬퍼서

잠시라도 응시하고

손을 뻗으면

그의 손이 따라왔다.


따라오는 그의 손을

스르륵 빠져가면

그의 눈은 슬픔에 전염되고

스쳐가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와의 인연은 속절없이 마감된다.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귀를 스쳐

뒤쪽으로 멀어지는 순간에도

그녀의 흐린 눈은 앞을 


그녀의 눈은 오직...

그의 눈을 응시하거나

그녀의 앞을 응시할 뿐


그의 전부를 보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번개처럼 뒤에서 반짝이는 빛을 연료로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앞으로 내달리는

오토바이 같은 것을 타다가...


그 번개가 뒤가 아닌 앞쪽으로

빛을 번쩍이는 바람에


아니, 빛은 그러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거기로 오토바이 같은 것을 몰았기 때문에


아니, 빛은 그러기로 되어 있었으며

그도 바로 그 빛으로 뛰어들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서른두 살에서 서른다섯쯤, 많아야 서른일곱쯤.

그는 앞으로 쏟아지는 빛으로 녹듯이

하늘에 사라졌다.





어차피 스쳐지날 그였으므로

살아있다 해도 만나지 않았을 그이기에

그녀는 숨을 고르고 눈을 감은 채

그가 죽었을 그날을 상상했다.


눈을 떠 당연한 듯

그의 우주가 시작되고

찰나의 순간

그 우주가 사라질 때까지


건너 건너

한 두 번 스치고

너머 너머로

한 두 번 바라보던 그를...


그는 거대한 대양

수천 마리의 물고기들 사이를 헤엄치기도 하고

인파 속 거리의 상점을 보며 천천히 걷기도 했다.

그가 머물던 깊은 바다 물고기 떼에 놀라고

그가 지나간 상점의 물건을 바라본다.


그는 남몰래 남다른 깊은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숨이 뱉어지고

들숨이 다시 들어오지 않았을 때조차,


생에 마지막에도 아쉬움 없이


여기에 내던져진 자신을 사랑하고

신(神)을 사랑하며 생을 마쳤다.





그녀의 눈은...

흐리지만 깊어서

동그랗지만 슬퍼서

잠시라도 응시하고

손을 뻗으면

그의 손이 따라왔다.


아쉬움 없이_

스쳐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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