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즉 바닥을 보인 인내심을 부여잡고...(고통과 자비)
어제 있었던 감정 다스리기
"아, 맞다!
나 핸드폰 두고 왔다."
팔을 뻗어 홀쭉한 책가방 앞주머니를 만진
첫째의 얼굴에 급격한 당황의 빛이 드리운다.
계획대로 준비하면 : 출발시간 30분
어쩌다가 늦어도 : 40분까지는... 그래, 오케이.
오늘은 이미 훌쩍 넘은 46분에서 47분 사이.
진즉 바닥을 보인 인내심을 부여잡고
우여곡절 끝에 서둘러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들려온
치명적인 대사.
'아, 맞다!...'
순간 엄마는 속으로부터 올라오는
'너 학교가지 마.'
를 억누르며
대신
(참는 게 다 티 나는 표정과 목소리로)
"둘 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를 뱉어낸 후,
급히 올라가 핸드폰을 챙겨 온다.
어떻게든 늦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누른 화는
결국 출발하는 차 안에서 폭발한다.
폭발은 순식간이다.
"8시 10분 되면 씻으러 가기로 했잖아!"
"20분이 넘어도 참고, 기다려줬는데...
늦게 씻고 와서 놀 시간이 어디 있어?
대체 거기 풍선엔 왜 들어간 간 거야!!!"
테이프를 돌려
약 30분 전.
안 그래도 바쁜 예민한 시간(엄마만 바쁜 건 함정).
첫째는 둘째가 어버이날 행사에서 받아 온 풍선을 갖고 놀다 터뜨렸고, 둘째는 울며 불며 돌려놓으라고 소리쳤으며, 엄마는 가까스로 둘째를 달래면서 형에게 사과를 요청하고, 그래도 풀리지 않아 우는 둘째에게 엄마는 이따 탕후루를 사준다고 제안했으며... 그러자 첫째는 예전에 자기는 비타민만 줬으면서 왜 동생은 탕후루를 사주냐고....(후략)
탈 수도 없고 꼬리도 잘려버린 안쓰러운 말..ㅠㅠ....
다시 차 안
현장으로 돌아와
3분도 안 걸리는 등굣길은
분노의 잔소리로 채워졌다.
오늘따라 차를 세워 기다리던 횡단보도 앞 신호등은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바로 초록불로 바뀌고
아마도 자신을 바라봤을 아이들을 외면한 채 엄마는,
"얼른 내려."
라는 말만 냉정히
앞을 향해 쏘아버렸다.
오늘 아이들은
"다녀와~"라는 목소리와 함께 늘 있던
엄마의 파이팅을 동작을 보지 못했다.
오늘 엄마는
"갈게요~"라는 목소리와 함께 늘 보던
밝은 미소를 보지 못했다.
그대로 차를 몬다.
...
'아... 가슴 한구석이 시큰시큰한 것 같다.'
학교에서도 계속 기분이 나쁘진 않을까?
원망하진 않을까?
그래도 가기 전엔 풀고 웃어줄 수도 있었는데
폭발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죄책감과 후회가 몰려온다.
조여 오는 가슴과
탁한 빛깔의 두려움을
가만히 바라본다.
싫은 느낌이지만
그대로 더 지켜본다.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려던 순간이 지나고...
서서히 안으로부터
자비와 용서가 드러난다.
'당신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내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언제나 효과가 있었던,
틱낫한 스님의 말씀도 떠올린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이 고통을 염려합니다."
...
'나는 당신을 염려합니다.'
'나는 나를 염려합니다.'
...
그래, 화를 내기 전까지 나름대로 분노를 인식하며
몇 번이나 초연함을 선택하려 노력했잖아.
순식 간에 휩쓸려 미워하고 상처될 행동을 했지만
횡단보도로 걸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슴 아팠던 건,
미안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야.
그게 진짜 너잖아.
너는 사랑이야.
너를 용서해.
아이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보내면서,
대책 없던 후회도 사그라든다.
경험으로 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잘 회복할 것이다.
유치원과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과 어울려
언제 그랬냐는 듯 즐겁게 공부하고 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죄책감을 흘려보낸 엄마는
오후가 되어 돌아온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전했다.
"그렇게 혼낼 일은 아니었는데,
엄마가 많이 화내서 미안해.
인사도 안 해줘서 서운했지?"
아들은 끄덕끄덕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갑자기 달리기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 나 오늘 달리기에서 왜 1등 했는지 알아요?
아침에 엄마가 화내서 유치원 갈 때 막 달리고 싶었는데, 사람들 많아서 못하다가 달리기 시간에 달린 거야."
"응? 그럼 엄마가 잘 달리게 도와준 거야?"
"네!"
좀 이상하지만..
어쨌든 좋은 결론.
어찌 보면 참 작은 일이다.
당시엔 분명히 참기 힘든 분노인데,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봐도 그렇게 화낼 일인가 싶다.
한 발만 물러서봐도 소소한 일상이지만,
매일매일의 아침 전쟁.
늦을까 봐 불안한 마음.
통제하고 싶지만 통제가 안 되는 두려움.
그러한 경험이 쌓여...
자동적으로 해묵은 반응이 올라온 것이다.
그런 나를 이해하고 받아준다.
두려움을 볼 기회,
침착함을 배울 기회에 얻었음에 감사한다.
몇 번이고 인식하다 보면
변화가 시작되고
자연스럽게 털어낼 날이 올 것이다.
고통은 자비를 깨운다.
+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거 알면서
'학교가지 말라'는 대사는 좀 그렇다.
'엄마 아들 하지 말라'는 것도 좀 유치하지 않나?
앞니가 다 빠진 우리 둘째처럼
내 안에 사는 어린아이, 너도 참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