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G의 숲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레인 Oct 20. 2021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영혼의 숲 #1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원치 않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슴 한 구석은 늘 허전했고, 알 수 없는 조급함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5/7(토) 10AM


내 이름은 클로닌, 한 때 나도 꿈 많은 소년이었다는  안 건  방금 전 나를 깨운 SNS 알람을 통해서였다. 어젯밤 나는 우연히 발견한 고등학교 선생님의 페이스북에 나도 모르게 안부 인사를 남겼었다. 졸업한 지 15년이나 지났는데 안부 인사라니… 금요일 밤 감성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기억하지!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당당했던 클로닌.’ 


초롱초롱보다 어색했던 건 '당당'이라는 단어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긴, 생각해보면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나는 꽤나 자신감이 넘쳤던 것 같다. 못 이긴 척 무대에 오르긴 했지만 신입생 OT 장기자랑에 나갔을 때 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흡족한 눈으로 나를 보던 삭발 선배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학생회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 


‘학생회라니, 완전 잘못 본 거지. 나 하나 잘 살기 바쁜 사람한테... ‘  


순간 ‘잘’ 살기는 고사하고 ‘그냥’ 살기도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 


딱 일주일 전에는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식장에 가던 나는 지나치는 건물의 유리창마다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낡아빠진 구두가 못내 보기 싫었다. 지하철을 갈아타는 데 ‘창고 대방출! 신발 만 원’이라고 써붙인 지하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내 신발을 본다고… 늦을 걸 알면서도 가게로 들어갔다. 만 오천 원짜리 구두를 이것저것 신어보기 시작했다. 예식에 못 가면 후회할 걸 알았지만 행동은 굼떴다. 기분이 가라앉으면 이성도 같이 바닥으로 꺼져버리고 마니까.


결국 나는 예식 시간이 다된 것을 확인하고서야 주섬주섬 가게를 나왔다. 어두운 자취방에 돌아와 행복한 사람들이 모여 있을 예식장을 떠올렸다. 좁은 현관에 서서 한참 동안 신발장에 달린 거울을 봤다. 초점 없이 멍한 두 눈, 서른 다섯 남자는 초라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걸까?’  


아무래도 직장을 다니면서 더 바보가 된  같다. 일도 재미없고 사람도 마음에 안 든다. 주기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퇴사 욕구는 요즘 들어 특히 상한가를 치고 있었다. 지난달부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이렇게 쓸모없는 존재였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취준생 때 생긴 무시무시한 자괴감이 다시 활동을 개시한 것 같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겠지?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지옥 같던 취업난을 생각하면 쉽사리 그만둘 수도 없다. 나름 모범생답게 적극적으로 진로 고민을 했건만 막상 취업 시장에 뛰어든 후에는 현실 타격이 제대로 왔다. 서류에만 스무 번 넘게 떨어지고 나니 재능이고 적성이고 ‘제발 붙게만 해주십시오’가 되었지.  


그나마 후배들을 보면 나 때는 양반이다. 요즘 신입들은 다 똑똑하고 야무진 것 같다. ‘경력 있는 신입’이라니 말이야 방귀야 했는데 세상이 원하니 진짜 그게 되더라. 시장의 요구에 발맞추어 여기저기서 일 잘하는 법, 현업 정보, 직무 스킬 교육 등이 쏟아져 나온다. 나도 자기 계발에 한창 열 올 리던 때가 있었지. 지금은 완전 의욕상실이다.


그나저나 일 년 동안 후임이 두 번 바뀌었는데 얘도 곧 나갈 것 같다. 센스 있는 후임보다 내가 더 잘하는 건 ‘버티는 거’ 하나인 듯. 그래, 나갈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 책임감이 강한 거라고 해두자. 


버텨야 할 이유는 또 있다. 대한민국 집 값이 미친 거다. 장가라도 가려면(그날이 올까?) 어쨌든 살 집은 있어야 할 텐데, 멀쩡하게 회사를 다녀도 주식을 하든, 투잡을 하든 하지 않으면 답이 안 나온다. 유튜브에서도 서점가에서도 돈 돈 돈, ‘누구는 어떻게 해서 돈을 벌었다.’ ‘부자 마인드는 이렇다.’ 구한 날 떠들어대지만 재테크에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유행하는 N 세계에 뛰어들 용기도 없는 나는 있는 직장에서라도 어떻게든 버텨야 현상유지라도 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그냥 살아야지 깊이 생각하면 불안해서 미칠지도 모른다. 





할 일이 없거나 반대로 할 일이 너무 많으면 생라면을 씹어먹으며 영화를 봤다. 


화면에 눈을 고정시키고 면이 어떻게 부서져 입에 들어가는지 모른 채 냉랭하고 고소한 밀가루를 우걱우걱 씹어 넘겼다. 영화가 끝나면 영화 속 주인공을 검색하거나 다른 사람이 영화에 대해 써놓은 글을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5/7(토) 11:20 AM


문제의 '당당' 댓글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됐네. 순간 별다른 스케줄 없는 주말 오전이라는 사실이 묘한 행복감을 준다.


‘이게 토요일의 여유지’ ‘더 생각해서 뭐하나’


여느 때처럼 라면 하나를 들고 넷플릭스를 켰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지? 영화는 분명 재미있는 내용인데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평소보다 뱃속도 더 더부룩한 것 같다. 웬만하면 귀찮아서 소파에 붙어있었을 텐데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사실은 아까부터 창밖으로 보이는 청명한 날씨가 계속해서 눈에 거슬리는 중이다.


‘밖에 나가서 산책을 좀 해볼까?’ ‘에이, 귀찮게 뭘.’


나갈지 말지를 30분째 실랑이하다 한심하단 생각이 극도에 다다를 때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난 정말 왜 이럴까? 미래를 고민해도 시원찮은 판에 나갈까 말까로 30분 넘게 고민이라니…’ 


자책으로 10분을 더 소모하고 나서야 주말 내내 몸에 붙어 있으려던 잠옷을 벗어던졌다. 생라면에 몸 전체가 불어버린 기분이었는데 막상 옷을 챙겨 입으니 대충 배가 좀 나온 거 말고는 봐줄 만하다. 운동화를 신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상쾌한 가을 공기가 몸안으로 들어왔다.  


‘나오길 잘했군.’

 

우라 집 앞에는 출근할 때마다 지나치는 등산로가 있다. 나무 계단을 올라가 얕은 언덕을 지나면 유명한 산자락과 이어진다는데, 올해 70이 된 아버지는 그 산이 참 좋다며 여기 올 때마다 한참을 걷다 오시곤 했다. 나에게도 한번 가보길 여러 차례 권하셨지만 내가 누군가? 마음이 움직이기 전까지 몸은 절대 안 움직이지.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끌린다. 늘 걷던 출근길을 바라보며 숨을 한번 크게 쉬어주고 평소에 가보지 않던 나무 계단에 올랐다.


계단을 지나 시멘트 언덕을 오를 땐 살짝 후회감이 밀려왔다. 속에서 라면이 붇고 있는지 가슴도 답답하고 체력이 달리니 숨도 가쁘다. 괜히 왔다는 생각을 다섯 번쯤 하면서 언덕 위에 도착했다.

 

‘캬~’ 

감탄이 생으로 흘러나왔다. 

언덕 끝에는 평지가 펼쳐졌는데 순간 하늘과 닿은 명당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적당한 나무 사이로 내가 사는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날씨까지 도와주니 풍경이 기가 막히다.


평지의 저쪽으로 잔디와 벤치를 지나 사람의 손길이 끝나가는 지점에 비밀의 공간처럼 숲길이 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짙은 흙바닥에 정교한 나무 기둥으로 지은 동굴집 같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숲길로 들어섰다. 



트림이 두어 번 나오더니 속도 좀 가벼워지고 체력은 다시 채워진 듯 상쾌해졌다. 건강한 나무의 푸르름과 푸르름 사이로 난 햇살, 햇살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한참을 취해있었다. 시간과 공간을 잊고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어디쯤 놓여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일까?


아니 이런 기분은 처음인 것 같다. 고요하고 평온하다. 치맥을 하면서 영화를 볼 때 느끼는 순간의 행복과는 차원이 다른데, 뭐랄까 이유 없이 그냥 존재함으로써 느끼는 깊은 행복이라고 할까. 이제껏 살면서 이런 행복이 있는 줄 몰랐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저쪽에서 빨간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보니 의자다. 철로 된 다리에 동그란 쿠션이 올라간 1인용 의자는 햇살 때문인지 원래 재질이 그래서인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방금이라도 누가 앉아있었던 것 마냥 깨끗하다.


'인적 드문 숲 속에 웬 의자? 누가 가져다 놓은 거지?'

'게다가 빨간색 뭐야, 여기 앉아 접신하는 건가?'


무섭다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일 텐데 신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앉아볼 자신은 없으니 조금 쳐다보고 지나간다.


에이 참, 무념무상을 즐기고 있었는데... 의자를 계기로 생각이  올라왔다. 산을 내려가면 다시 닥칠 현실이 괴롭도록 다.


현타가 제대로 와서일까? 잠시 후 나는 질문인지 한탄인지... 누구에게 향하는지도 모를 말들을 갑자기 쏟아내기 시작했다.


인생이 왜 이리 힘든 거냐고,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냐고,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 클로닌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 예전의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꿈도 희망도 이제는 지긋지긋해졌지만 한 때는 나도 정말 성공하고 싶었다고. 아니 아직도 그래, 나도 잘 살아 보고 싶어!!!! 


눈물이 흘렀다. 따뜻한 눈물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떨구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잘 살아보고 싶다니 다행이네. 그래서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뭔데?’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내가 잘 못 들었나?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뭐냐는 말이야. 성공하고 잘 살아보는 게 어떤 모습이냐고.’ 


말문이 막혔다. 매일매일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게?... 난 뭘 하고 싶은 거지?‘

 

내가 되묻자 목소리가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꿈을 꾸기엔 현실이 너무 팍팍하다고 푸념하지. 하지만 정작 자신의 꿈이 뭔지 잘 몰라. 


꿈이란 말이 이상적으로 들린다면, 꿈이 아니라 원하는 일이라고 해보자.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뭘까?


그건 바로 진실된 욕망을 모르거나 잘 못 알고 때문이야. 모르니까 상상할  없고 믿을 수도 없지.


진실된 욕망이라고? 욕망이라면 이제 신물이나. 나도 누구보다 성공하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고 싶었다고. 보이지도 않는 이상을 좇으며 내가 얼마나 방황하고 실망하고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는지 네가 알기나 해? 남들처럼 적당히 타협해서 일찍 자리 나 잡을 걸. 괜히 최고의 직업을 찾겠다며 헛바람만 들어가지고...


스물아홉 뒤늦게 취업하면서 이런 생각은 다 접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신기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수많은 규정과 편견에 둘러싸여 꿈마저 주입당하고 말지. 내가 말한 '진실된 욕망'은 살면서 세상 눈치, 눈치 보며 정한 목표를 말하는 게 아니야.


진짜 꿈은 영혼이 원하는 일이야. 네 영혼은 백만장자가 되길 원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 영혼이 원하는 일을 발견한다면 넌 반드시 그 일을 하게 될 거야.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되거든.


‘영혼이 원하는 일?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목소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노력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해. 영혼이 원하는 일을 찾는 건 새로운 '일'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나'를 찾는 과정이야. 사실 새롭다기보다 원래의 나를 찾는다는 표현이 정확하지. 결코 쉽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이 싫지 않았다. 어차피 노력해도 안 되는 인생, 더 나빠질 것도 없다. 지금쯤이면 모든 걸 다 걸고 변화해봐도 되지 않을까?


이번에도 목소리는 내 마음을 읽었다.


너무 거창하게 마음먹지 마. 말했잖아.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라고.


다음에 만나면 욕망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말해줄게. 사실 넌 욕망을 포기했다고 했지만 아직도 성공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고 있어.


욕망은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이해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야? 보이지도 않고 목소리만 들리고 있잖아. 


클로닌, 나는 너를 아주 잘 알아. 계속해서 너를 지켜보고 있었지. 오늘 이렇게 너와 만나다니 기분이 아주 좋은걸? 나에 대해서는 천천히 알게 될 거야. 우선 나를 G. 클로닌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너와 아주 비슷하지만 위대한 존재. Great 클로닌의 줄임말이지. 하하.  


그러고 나서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얘가 진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내 이름이 클로닌인데 자기를 G. 클로닌이라고 하라니! 영 어색해서 내 맘대로 그냥 G. 라 부르기로 한다.


그런데 나는 정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상하게 위로를 받은 것 같다. 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영혼의 숲'


꿈꾸듯 산을 내려오며 속으로 웅얼거렸다. 대체 오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돌아오는 길엔 아까 봤던 빨간 의자가 안 보인다.


나는 다시 영혼의 숲에 오기로 했다.




영혼의 숲#2 : 영혼이 원하는 일은 찾는 게 아니라...


[추천] : 경제적 자유보다 자아실현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하고 싶은 날+진정한 나다움에 대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