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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Nov 18. 2023

머리만 커버린 인형... 삶으로 뛰어들다.

김은영(소설가)


머리만 커다란 인형이 떠올랐다.

몸통은 작아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이 은영이 마주한 진실의 모습이었다.


삶의 목적을 찾겠다며

수많은 날을 머리로만 헤매었다.


늘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궁금했기에

어느 순간 그것은 즐거움이 되었고


어떤 날은 진리를 깨달은 듯

어떤 날은 세상의 원리를 깨달은 듯


직관적으로 느껴왔던 것들이 손에 잡힐 듯 정보가 쏟아지고, 어렴풋한 것들의 퍼즐이 맞춰지며, 은영은 점점 더 이상(理想)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생각 위에 생각을 쌓던 어느 날

높아진 담 위에서 현실을 보았다.


그곳으로 가야 함을 알았고

갈 수밖에 없었지만

삶으로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올라 선 담의 높이 때문인 줄 모르고,

두려움을 떨치려 다시 담을 쌓았다.


먹고사는 것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듯

세상 나 혼자 숭고한 듯,


영감과 배움을 핑계 삼아

책상에 앉아 머릿속에 뭔가를 집어넣으며

온갖 영적이고 사랑스럽고 고귀한 것이 자신에게 채워진 듯 착각을 하고서.


어느 날 은영은

영화 속 여교수의 지적이고 조용하면서도 힘 있는 강의를 넋 나간 듯 바라보며 그녀와 자신이 참 닮았다고 느꼈지만,


현실의 그녀는

논문은커녕 무명의 글을 쓰는 잠옷을 입고 간식을 먹으면서 영화를 보고 있는 머리만 커다란 사람이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나도 도와줄 수 있는데...


영화가 끝난 후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배우를 검색하고, 곧이어 여기저기 뜬 관심사들과 추천 동영상들을 보았다.


사실은 아까부터

가슴이 답답했다.


손에서 놓지 못하는 핸드폰을

그러면서도 동시에 집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누군가를 부러워하다

그럴듯한 강의에 머리를 끄덕이다가


남들에 감탄하고, 이론에 감탄하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어설픈 추측들로


여기가 아닌

저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서

지금 여기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외면하고 있다.


....


예전의 은영이라면

끝까지 무시하고 도망치거나

끝없는 자책감과 자기혐오의 패턴으로 들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가만히 멈추는 법을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내면을 돌아보며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듯했지만

사실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이유는 바로

변할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희망을 보았기에.


힘을 빼고 고요히...

현재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거기서부터 변화가 싹튼다는 걸,

이제 은영은 알고 있었다.


그래, 한심한 나를 인정할게.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사랑해.



....

띠리리링~

때마침 건조기의 알람이 울렸다.


이제 막 꺼낸 따뜻한 빨래를 개며

옷의 주인들을 떠올린다.


세상에 사랑을 전하겠다고

누군가를 돕고 싶다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는데


여기, 사랑이 있었다.


답답하던 가슴이

여기에서 풀려나고 있다.


하루종일 책을 보고

산책을 하고 영화를 보며

삶의 의미를 찾고

신의 통로로서 자신을 곱씹고

사랑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며

숭고해지는 것보다


가족들을 위해 빨래를 개는 일.

반찬을 만들고 정성스레 밥을 하는 일.

하찮게 여긴 그 일이

오늘 그녀가 가장 잘 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삶의 의미가 굳이 필요할까?

이렇게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축복이고 신비인데...


진정한 사랑엔 이유가 없는 것처럼

삶에 흠뻑  빠진 사람은 '왜 사느냐' 묻지 않는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의 나

여기 현실,


커다란 목표, 보이지 않는 이상을 좇느라

존재로서 충만한 나 자신과

내 곁의 축복을 놓치지 말아야지.


거창한 목표에서 힘을 빼고서

그제야 서서히 자연스럽게-


평온한 움직임으로


_

생각과 감정에 파묻혀

글을 쓰지 못한 날이 많았다.


결국엔

생각과 느낌이 남은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남았을 뿐이었다.


다시 삶 속으로 뛰어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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