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을 떠올리고 회한의 눈물을 흘린 기억

by 심준경

예능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회한의 눈물을 흘린 기억은 흔치 않을 것이다. 보통 TV를 보다가 눈물이 난다고 하면, 진부하지만 개인의 삶과 깊게 맞닿은 순간일 때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가족 이야기다. 가족은 우리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화면 속 연출이 마치 직접 대화를 나누는 듯 다가올 때 우리는 쉽게 동일시한다. 그래서 부모님의 헌신이나 희생 같은 이야기가 조금만 감상적으로 나와도 뭉클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모든 부모가 똑같은 방식으로, 혹은 똑같은 노력만큼 희생한 것은 아니지만, 동일시가 작동하는 순간 우리는 각자의 부모를 떠올리며 그 헌신을 겹쳐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서술하려는 눈물은 그런 눈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가족 이야기에 감정이입해 터져 나온 눈물이 아니라, 어떤 행동 패턴이 내 것과 닮았다고 느껴져서, TV를 끄고 한참 뒤에 떠올리다 흘린 눈물이었다. 대학 시절 나는 학자를 꿈꿨다. 포부는 점점 커져서, 언젠가는 학문 안에서 대가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깜냥이 아니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빌려 들이파 보았지만, 본문은커녕 주석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지금 읽는 대학 새내기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당연하다. 대가의 책은 석사, 박사도 따라가기 벅차다. 그래서 대가다.) 그날, 책을 덮고 방 안에서 훌쩍 울었다.

그럼에도 욕망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게 똑똑함이란,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길을 찾아내는 것, 진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대학교 3학년 무렵, TV 다시보기 서비스로 <더 지니어스: 블랙가넷>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다. 두뇌 대결 형식의 예능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그런 프로그램을 '천박'(?)한 두뇌 쇼쯤으로 여겼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은 나여야 한다고 믿고 싶었던 어린 나는, 뇌섹남이니 천재니 하는 타이틀이 붙은 프로그램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미쳤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진짜 지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그렇게만 믿고 싶어 했다.


왜 하필 시즌3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마 어디선가 잠깐 보았는데, 의외로 재미있어서 정주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더 지니어스: 블랙가넷>은 서바이벌 형식으로 두뇌 게임을 펼치는 프로그램이었다. 본게임을 하고, 탈락자는 생존자 한 명을 지목해 데스매치를 치른다.

그 프로그램에는 인상 깊은 출연자도 몇몇 있었다. 내가 한때 즐겨 보던 만화 《닥터 프로스트》의 작가 이종범 씨, 지금은 어둠의 방송인이 되었지만.... 국회의원을 지내고 예능인으로 활동하던 강용석 씨, 여러모로 멘탈 관리를 잘하면서 서바이벌 예능 출연하면서도 호감형 이미지를 쌓았던 최연승 씨, 그리고 당시의 나를 괜히 자극하던 인물, 잘생기고 잘 나가는 데다 나보다도 어린 대학생 오현승 씨. 그를 보며 속으로는 약간 짜증을 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10년이 지나 우승자였던 장동민 씨의 플레이 스타일이 어땠는지마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몇몇 장면만은 또렷하다. 그중 하나는 만화가 이종범 씨가 탈락하던 회차였다. 그는 시즌 중반까지 버티다가, 결국 데스매치 상대로 지목당했다. 그러다가 데스매치를 준비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인터뷰가 나오는데, 형이 그 인터뷰를 보며 말했다.

“저 사람은 ‘예상하지 못할’이라는 말을 자주 쓰네.”

그 장면은 나로 하여금 지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 삼국지의 제갈공명처럼 남들이 생각지 못한 묘수를 내놓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은 최연승 씨와 오현승 씨의 데스매치였다. 프로그램 초반, 오현승 씨의 인터뷰를 보면 그의 플레이는 직관적이고 단순해 보였다. 나는 그래서 그를 평범한 플레이어라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는 꾸준히 살아남았다. 후반부로 갈수록 보니, 그의 플레이는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정석에 가까운 전략이었다.

그는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분명히 짚어내고, 거기에 맞는 전략을 세운 뒤 흔들림 없이 실행해 나갔다. 그 명료한 과정들이 하나씩 먹혀들어갔다. 반면 최연승 씨는 결승 진출을 걸고 오현민 씨와의 데스매치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평범함으로 비범함을 이기려 했지만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

그때 문득, 비범함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시청자의 눈으로 보기에 오현민 씨의 플레이에는 특별한 의외성이 많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던 비범함, 곧 ‘남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수를 발견해 내는 능력’과는 달랐다. 그러나 최연승 씨는 그것을 비범함이라 불렀다. 물론 이는 모든 정보를 알고 보는 시청자의 착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게는 낯설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던 바와는 다른 방식의 비범함이라니...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다가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비범함에 대한 최연승 씨의 전혀 다른 생각들이 덮쳤다. 아... 내가 원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가득했지만, 정작 ‘똑똑함’이 무엇인지조차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똑똑함이란 단순히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과정을 명료하게 이어가며 필요한 것을 분명히 짚어내는 힘일 수 있겠구나. 지하철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치 내가 세월을 헛산 것 같았다.

그 눈물 이후, 나는 점차 똑똑함에 대한 다른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다. 남들이 하지 못한 말을 내뱉거나 의외의 수를 던지는 것은 똑똑한 사람이 보여주는 현상일 뿐, 똑똑함 그 자체는 아니었다. 진짜 똑똑함은 사고의 과정을 얼마나 명확하게 이어 가는가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며, 어떻게 거기에 다다를 수 있는지를 차근차근 짚어내는 힘, 바로 그것이었다.

그날의 경험 이후 점차 내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던 것 같다. 똑똑함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는 대신, 명료한가라는 기준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결론에 이르더라도, 그것이 명료한 사고 과정을 통해 도달한 것인지 늘 확인하려 한다. 그렇게 새로운 습관을 하나씩 쌓아갔고, 그 습관은 지금도 내 사고와 삶의 기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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