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괴로웠던 귀경 버스

by 심준경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전에 설날을 보름 앞두고 돌아가셨다. 때문에 이 시기 우리 집은 보름 간격으로 제사를 지낸다. 올해도 설해를 보름 앞두고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얼굴조차 기억에 남지 않는 할아버지인 관계로, 내게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감흥이라고는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간 소회 정도밖에 없었다.


세종시. 부모님이 우리 형제를 대학에 보낸 후, 새 둥지를 튼 곳은 세종시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세종시와 대전시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내가 세종에 갔다 오면 친구들은 대전에는 잘 갔다 왔느냐고는 묻는다. 하지만 나에게 세종과 대전은 크나큰 차이를 갖는다. 단순히 그 거대한 신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풍취 같은 것이 아니다.


대전은 나에게 고통스러운 공간이었다.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몇 가지 미세한 장애들로 인해,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어울릴 수 없는 정도였다면 참 좋았겠다. 인생의 수수께끼 같은 그 장애들로 인해 나는 온갖 무시를 당하곤 했었다.


초등학교 선생들에게는 문제아였고, 중학생 때는 학급에서 고약한 장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점점 마음의 병이 쌓여 고등학교는 자퇴해야 했다. 심리 치료를 거치며 나는 어린 시절에 대한 내 감정을 정리하려고 대전에 간 적이 있었으나, 아직도 그곳에서 숨을 쉬기조차 버거운 느낌이었다.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부모님이 대전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면, 난 그곳을 내려가는 것이 지독하리만치 싫었을 것이다. 청소년기의 재현이라는 느낌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미미한 차이일지도 모르는 세종시와 대전시의 경계가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심리적 방어선이 된다.


세종도 그다지 긍정적인 기억들이 있는 도시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도시에서는 누군가가 나를 일부러 괴롭게 하려 했던 적은 없었다. 아는 사람이 부모님, 그리고 비슷한 시기 세종으로 이사했던 절친한 친구밖에 없던 도시에서 누가 나를 악의적으로 괴롭히겠는가.


그 도시에서 종종 괴로운 건, 여전히 존재하는 미세한 장애들로 인해 종종 반복되는 실수들로 인해 듣게 되는 잔소리들이 내 트라우마를 조금씩 자극하는 것들이랄까. 아니면 기분장애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급격히 불어난 체중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잔소리를 견뎌야 하는 정도랄까. 아니, 이런 일들에 내 잘못들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하기 힘든 노릇이 아닌가.


그렇다. 사실, 부모님의 잔소리로 인해 세종에 내려가는 것도 나에게는 굉장히 버겁다. 세종에 내려가기 전에는 내 마음을 항상 달래주어야 한다. 일요일, 세종으로 가는 버스를 탈 때에도 잠시 다이어트를 접고 내가 좋아하는 에그타르트 하나를 사 먹으며 마음을 달래야 했다. 부모님에게는 참 섭섭한 이야기겠지만, 나는 세종에 내려가는 버스보다 서울로 가는 버스에서 마음이 훨씬 편하다.


그러나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버스를 내리고 나서 걷는 게 힘이 들 정도였다. 오늘은 버스에서 숙제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부 숙제였다면 이토록 괴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1주일에 한 번씩 반복하고 있는 심리 상담에서 내어준 숙제였다.


괴로웠던 기억을 꺼내보고 그것을 다시 또 다른 이미지로 덮어 재구성해버리는 작업을 하기도 하는데, 지난주가 딱 그런 주였다. 중학생 때 고약한 장난을 하는 어떤 자식에게 너무 화가 나서 어찌할 줄을 몰라서 손을 덜덜 떨며 목을 조르게 되었던 일이 있었다. 나는 곧 아무도 없는 교실에 남아 똑같이 보복을 당했었다. 나는 괴로움에서 탈출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지난 시간,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그 기억에 대한 재구성의 과정을 녹음하도록 하고, 다시 듣도록 하는 걸 숙제로 내어주셨다.


그 숙제가 참 버거웠다. 녹음한 걸 듣는 것뿐인 데 엄살도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숨을 일정히 유지하기 힘든 만치 감정적으로 버거운 일이다. 그 녹음 내용을 다시 듣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오기도 했다. 그래서 녹음 파일을 흘려듣거나 정지시키고, 자꾸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리는 일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버스에서만큼은 계속 앉아있을 수밖에 없으니, 버스가 그 숙제를 해내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그곳에 앉아 녹음 파일을 틀었다. 서서히, 보복을 당했던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졸려오는 목, 막히는 숨, 조곤조곤하게 나를 능욕하던 그 자식의 목소리. 참 이상한 일이다. 다른 기억만큼은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이번만큼은 참 어려웠다. 나는 왜 그토록 무기력했을까, 나는 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는가, 나는 왜 그 자식에게 그토록 당하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는가. 상담시간에서 그 기억을 재구성할 때조차도 나는 왜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격려해줄 수가 없었는가. 벗어날 곳 하나 없는 고속버스 좌석에 앉아 마음이 참 아팠다. 창밖의 논은 황량했고 하늘은 우중충했기에, 마음을 돌릴 곳은 먼 산밖에 없었다.


서울 집에 오고 나서도 기분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꾸 되뇐다.


이곳은 대전과는 다른 곳이다...

이곳은 대전과는 다른 곳이다...

이곳은 대전과는 다른 곳이다...


서울 생활은 이런 되뇌임과 같이 시작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의지. 어떻게 해서든 나는 다른 삶을 살아냈고, 1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저런 절망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나에게는 서울이 좋은 수백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한 명의 인간으로 대접 받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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