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기억

표정, 향기와 색깔이 있다.

by Panda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고민이 있거나 답답한 일이 있을 적이면 하염없이 걷던 길이 있다.

날이 좋을 때면 엄마와 아빠 손을 잡고 걷던 산책로 이기도 하다.

여름이면 가족이 모두 나와 그 길을 따라 걷다 나오는 공원에 돗자리 깔아 놓고 다 같이 엄마가 싸주신 김밥을 먹기도 했다.


바다를 따라 끝없이 걸을 수 있는
제주 용두암 해안도로


소녀 시절, 무엇이 그리도 크게 고민이 있었는지 방 책상 앞에서 한참을 끙끙 앓다가 해결점을 도저히 찾을 수 없으면 무조건 뛰쳐나와 바다를 보며 걸으며 울기도 했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어쩔 때는 저 멀리 보이는 바다가 밉기도 했다. 저 바다 넘어 있을 '서울'이라는 곳이 어떤 곳일까 참 궁금했다. 저 바다만 없었으면 서울은 어쩜 그리 멀지 않을 곳일 텐데 하며 바다를 원망했다.

지금은 "제주한 달 살기"처럼 제주도에 사는 게 하나의 로망처럼 트렌디한 도시로 조금씩 발전해가고 있지만 예전엔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라는 속담처럼 제주는 2박 3일 정도로 왔다가는 관광도시이지 정착해서 살아보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어린 소녀였던 내게도 그랬다. '서울은 어떤 곳일까?', 늘 상 궁금했다. 마음만 먹으면 닿을 수 있는 그런 곳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 두 공항 편밖에 없던 시절이었기에 육지라는 곳을 가려면 큰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래서 바다가 때론 밉기도 했다.


그러나 원망의 대상만 이었던 건 아니다. 봄과 가을이면 엄마와 아빠랑 같이 걷던 그 길이 참 좋았다. 어쩜 바다가 옆에 있어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잔잔히 흐르는 바다 물결을 보며 함께 걸을 수 있음이 행복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카페들이 즐비해 있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라이브로 음악을 연주해 주던 카페들도 있었는데 가게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맞으편 바다를 벗 삼아 음악을 들었다. 그런 날은 운이 좋았다며..

여름이면 용두암 근처 바다에 발을 담가 더위를 식히기도 했고 어떤 날은 바다 안으로 들어가 보말을 잡기도 했다. 한가득 보말을 주어 담아 집에 오면 엄마가 보말들을 깨끗이 씻어 삶아 주었다. 거실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이쑤시개를 이용해 하나하나 까먹던 재미가 있었다. 지금은 제주 용두암이 파도로 인해 그 형체가 조금 깎였지만 예전에는 꽤나 유명한 관광 명소중 하나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줄지어 있는 횟집들도 볼 수 있다. 관광버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었다. 여전히 내가 걷던 그 길 따라 횟집들은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한두 대 정도 관광버스도 보인다.


사람들은 흔히 추억을 기억한다고 한다.

어떤 음악을 유난히 좋아하는 건, 물론 그 음악 자체가 선사하는 매력도 있지만 그 음악에 깃든 자기만의 추억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 누군가와 함께 듣던 그 음악
그 시절 힘들었던 나를 위로해주던 그 음악




음악뿐만 아니다. 어떤 물건, 어떤 장소, 어떤 특별한 감성에도 그 추억이 물들여져 있을 수 있다. 그 추억은 그것들을 다른 것들과 다르게 만든다.


내게도 특정 바다가 존재한다. 나의 소녀 시절을 오롯이 기억하게 해주는 그 바다.

모든 바다가 다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바다만큼은 내게는 다르게 보인다.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보면 명확하게 설명을 할 수는 없다.


분명 한건 내가 바라보는 그 바다는 어떤 표정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향기를 가지고 있다.


항상 기억하고 싶은 그 시절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나만의 기억이 배인 표정과 색깔 그리고 향. 비록 그 바다가 다른 어떤 바다보다 더 멋지고 파랗지는 않더라도 나만 아는 그만의 색깔이 참 좋다.


‘너는 행복 아이다’ 하며 나에게 용기를 주던 그 바다만의 인자한 표정과 향이 나는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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