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그 찰나가 있다.
한순간이다.
어떤 대상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끌리게 되는 경우도 있고 알지 못했던 매력을 새로 알게 되면서 일수도 있다.
나는 내가 덕후 성향이 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한번 무언가에 탁 꽂히면 그것에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지금에야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인정 하자면, 나는 덕후 성향이 굉장히 농후한 사람이다.
최근에 갑자기 몰입해서 좋아하게 된 건 '마블영화'들이다. 예전엔 띄엄띄엄 그냥 남들 본다기에 몇 번 봤었다. 사실 어벤저스만 개봉하면 이곳저곳에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아 유행에 뒤처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봤었다. 앞뒤 사정 모르고 영화를 보다 보니 내게는 그저 코스프레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액션물에 불과했다. 고백하자면 보다가 잠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런데 마블 영화 광팬인 조카가 조잘조잘 옆에서 영화 설명을 귀엽게 해대는 통해 캡틴 아메리카 1을 먼저 보았고 내용을 이것저것 찾아보게 되었다.
그것이 그 순간이다.
마블 영화들은 솔로 무비에서는 캐릭터들의 사연을 풀어 놓고, 이것들이 촘촘하게 서로 이어져 어벤저스에서는 스토리 완성이 이루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나는 마블의 광팬이 되었다.
한동안은 10년어치 마블 영화들을 한 번에 몰아 보는냐고 밤늦게 자기가 일쑤였다. 마치 미국 드라마 한 번에 몰아 보듯 뭐에 홀린 사람처럼 영화를 보고 또 보며 제작자가 연결하는 스토리 구성에 놀라기도 하고 배우들에 흠뻑 빠지기도 했다. 원인과 결과를 끼어 맞추며 영화를 보니 캐릭터 하나하나 놓쳐지지가 않았고 싸우는 장면은 이제 단순이 치고받고 하는 씬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밤새 마블 영화 몰아보던 동안을 참 즐겼다. 무언가에 빠져 산다는 건 일상에 작은 활력소가 된다. 한편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밤이 너무 늦어 이제는 자야지하며 내일이 기다려졌다. 다음 편을 빨리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또 빠져있는 건 미술사의 한 영역이다. 사실 다른 미술사는 잘 모르고 파리 인상주의 파에만 빠져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모네 전시회를 열어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발걸음을 때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았던 작품이 모네의 '해돋이'였다. 첫눈에 반하는 누군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듯 그 자리에 서서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았던 거 같다. 얼핏 고등학교 시절 미술책에서 이름을 들어 본 게 전부였고 해돋이라는 작품이 왜 유명 해졌는지에 대해서 아는 지식은 전혀 없었다. 그냥 순간 그림 속 흘려가는 강물이 3D처럼 내 눈 앞에 일렁거렸다.
그때 이후 한참 흐른 후에 파리에 갈 일이 생겼고, 인상주의 관련 책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마네를 알게 되었고, 모네를 더 잘 알게 되었으며, 피사로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드가에게 빠지게 되었다.
그들에 이야기 관련 책들을 참 많이도 읽었다. 앞 뒤 전후 미술사는 잼병이고 딱 인상주의 작품들과 작가들의 뒷 이야기만 참 흥미로웠다. 어떤 책은 작품 위주로 어떤 책은 화가들의 사생활 위주로 작품에 대해서 풀어 놓는데 각각 저마다 내게는 모두 좋았다. 화가들 관련 이야기들이 읽는 것이 너무 즐겁기 때문이다. 가끔 서점 갈 때 인상주의만 묶어놓은 새로운 책을 발견하면 그렇게 신날수가 없다. 그리고 이 덕후 기질은 언제나 내 다음 여행지도 다시 한번 파리를 방문하고 싶은 위시리스트로 연결된다. 아마 다음엔 파리만이 아니라 교외로 나가 그들의 발자취를 밟아보는 새로운 여정도 포함시키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한순간 나를 빠지게 만드는 건 사람도 포함된다. 모든 건 순간이다. 그 순간 때문에 '나와 그, 그와 나 사이'에 관계가 변하게 된다.
모르는 누군가에서 더 알고 싶은 상대로..
회사 동료였던 그와 첫 데이트를 했던 건 가을 어느 날이었다. 사실 데이트라고 여기기 보다는 나는 그저 순수하게 생각했다. 그저 친구와 만나 저녁 먹고 차 마시는 일과 같은.
어떤 미국 드라마에서 금요일 혹은 토요일 밤 저녁 7시 이후에 남녀가 만나는 건 무조건 데이트이다 라고 주인공의 친구가 이야기하던 게 생각난다. 그래, 아마 아무 호감이 없었다면 일 끝나 밥 먹으러 가자는 그의 제안을 싫다고 했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시에는 그냥 약속 없는 금요일 밤 나쁘지 않겠다 하는 마음에 그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일하면서는 알지 못하는 서로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아무 말이나 막 지껄이는 나에 이야기를 경청하고 웃어주고 공감해주고 궁금해하는 그를 느낄수 있었다. 그가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나는 느꼈다.
그게 그 순간이었다.
이 사람이다... 하는 그 순간..
그와 함께 했던 시기 동안 희로애락 모두 존재했다. 모든 연애가 그렇듯.. 내 마음속에 심한 요동은 여러번 있었지만 마음에 업앤 다운 보다도 함께 함이 더 행복했다. 사랑에 빠진다는 건 어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마음, 사랑에 빠진, 함께 하는 순간에 대한 행복, 이 모든 것들은 일상의 사사로운 감정의 노동을 잊게 하는 그런 지점이지 않을까.
무언가에 빠지는 순간 그리고 그것에 빠져 있는건 어쩜 내 삶을 지탱하게하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그 찰나가 영원히 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