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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da Nov 01. 2018

에필로그

나는 도쿄 생활자가 되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게 인생이야."


습관처럼 했던 말이다.

"누구도 누군가의 인생을 단정 지을 수 없어, 왜냐면 우리 인생은 정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야. 지금은 상황이 안 좋아도 너무 걱정 마. 일주일 후엔, 한 달 후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잖아"

하며 누군가가 안 좋을 일로 괴로워하면 내가 전하는 위로의 말이다. 어쩜 나 자신에 대한 합리화를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타인을 위한 위로이자 나를 위한 위안의 말


일상이 지겨워질 때면 혹은 좋지 않은 일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겹겹이 일어날 때면 미래는 아무도 단정 지을 수 없다며 중얼거리곤 했다.


사실 제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을 때 겉으론 무척이나 쿨하게 제주 귀향을 결심한 척 행동했다. 하지만 내심 두려움이 내면에 존재했다. 막상 회사를 관두고 프리랜서를 자처하며 살자고 하니,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돈 100만 원 벌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야심 차게 제주 내려가면 하고자 했던 사업도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사이의 벽은 꽤 높았다. 정말 평소에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도전해보고자 계획한 일은 현실에 부딪혀 보류를 선택해야 했다. 뭐가 되었든 돈은 벌어야 했다. 잘하지 않는 영어이지만 그래도 학생들 기본 문법은 가르칠 정도는 되기에 '숨고'라는 사이트에 영어 기본 문법에 관심 있는 분들 연락 달라는 프로필을 등록했다. 몇몇 연락은 닿았으나 시간당 2만 원짜리 영어 과외자리를 얻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주일 두 번 2시간, 한 달에 4번이면 8시간, 그럼 내가 한 사람당 과외를 해서 벌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16만 원이었다. 100만 원을 벌기 위해서는 최소 5-6명 정도를 설득해야 했다. 그런데 정말 연락이 닿은 단 한 사람과도  선생님과 제자라는 관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동시에 물론 제주생활은 행복했다. 어렸을 땐 사실 제주를 떠나고 싶었다. 매일 보이는 바다와 산이 지겨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변한다. 그래, 정말 사람은 변한다는 걸 제주를 떠나 살며 다시 제주로 돌아와 절실히 알게 되었다. 삶의 곳곳에 숨겨져 있는 일상의 작은 변화는 내게 감사함을 선사했다. 노을이 지는 여름밤에 하늘을 보며 매번 감탄하곤 했다. "하늘 좀 봐봐"라는 말을  매일 하는 바람에 7살 조카는 "고모, 하늘이 그렇게 예뻐? 고모는 매일 하늘 이야기야" 하며 귀여운 핀잔을 듣기도 했다.

서울에 살 땐 대형 쇼핑몰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각종 맛집과 영화관이며 쇼핑까지 한 번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쇼핑몰에서 친구를 낮 1시쯤  만나 하루 종일 해가 지는지도 밖이 추운 지도 더운지도 모른 채 시간을 보내다 문이 닫힐 때 헤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날은 집으로 돌아오면 뭔가 모르게 피곤하고 오늘 하루 뭐했지 하며 멍해지곤 했다.


큰 백화점과 대형 쇼핑몰이 없는 제주가 싫던 나는 이젠 그런 이 곳이 참 좋아졌다.

천천히 산책하며 쇼핑을 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면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해가 져 갈 때는 가끔 쇼핑을 하다 멈추고 해가 지는 하늘을 가만히 쳐다 보기도 했다. 이 작은 일상의 차이는 내가 이곳 제주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싫었던 일상이 지금은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 보니 사람은 참 변하나 보다. 더운 날은 해변에 가서 수영을 하고 오기도 했고 주말이면 올레길과 오름을 걷고 했다.

 

자연의 변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제주였다.


어찌 이 곳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 있을까?   

내가 치열한 서울 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서울에 있는 고층 건물과 대형 쇼핑몰을 더 갈망하고 감탄을 느꼈을 것이다. 지긋지긋해진 직장 생활 때문에 지쳐 내려온 나였기에 아마 이 소소함에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었다. 스스로 먹고 살길을 찾으며 제2의 직업을 찾던 중 헤드헌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는 오피스가 없기에 일본에서 일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필요하기에 일본어를 못해도 큰 상관은 없다고 했다. 면접이나 봐보자 시작했던 일인데 1차 면접이 붙고, 2차 면접이 붙고,  그렇게 3차 면접까지 가며 Job Offer를 받게 되었다.


엄마는 내게 먼저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정말 그렇네"라고 하셨다.

다시 도시 생활자가 되어야 한다.


도시가 싫어 제주로 왔는데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내가 이방의 국가에서 과연 잘 적응해서 살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고민 없이 바로 결정할 수가 없었다. 며칠간 생각하고 고민 끝에 나는 여행자가 되어 보자였다.


나는 늘 경험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제2의 삶을 준비하던 내게 제1의 삶도 아니고 제3의 삶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제3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옵션이었다.


'그래, 정말 말로만 반복하던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게 인생이구나. 정말... 그런 게 인생이구나.'


제2의 삶인 제주에서 계획했던 것들은 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여러 경험을 하며 느낀 것 중 하나는 무언가 한 가지에 목 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여행을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느낀 것이었다.


회사 생활에 목 매일 때가 있었다. 멋진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승진도 하고 인정도 받으며 돈도 많이 벌고 싶었다. 좋은 회사, 이름 있는 회사에 들어가 승진하며 고연봉을 받아야 성공한 삶이라고만 여겼다.

나 자신을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나는 그렇게 승진을 위해서 어떤 줄을 서고 매번 술자리를 참여 하며 치열하게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는 재목도 아니었다. 그다지 사교적이지도 못하다. 회식은 죽어라 싫어하고, 눈치 보는 삶도 정말 싫어했다. IT 관련 일을 하지만 아무리 보고 보고 또 봐도 컴퓨터 언어들은 이해가 도통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직장인으로

IT 회사에 있으며 성공하려고 발버둥 쳤으니 될 리가 없었다. 스트레스만 쌓였고 뒤쳐지는 나 자신을 부족하다고 탓하며 자존감만 낮췄다.


쉬는 기간 물론 100만 원 버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절절하게 느꼈지만 동시에 이런저런 내가 즐길 수 있는 일들을 찾다 보니 회사로 다시 돌아가도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목매이지 않는 삶은 사람에게 여유를 준다. 그래, 나는 회사에 목 매일 필요가 없다. 내게는 또 다른 자아실현의 방법들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회사라는 공간 역시도 나의 그 자아실현을 해줄 여러 통로 중에 하나 일뿐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나를 한결 수월하게 해 줬다.


그렇게 해서 나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가보는 여정이다. 끝이 없는 여정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모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여정의 첫 주를 무사히 마쳤다.


2018년 10월 어느 날. 도쿄 날씨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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