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by 김 경덕

태풍


태풍 '찬홈'의 영향으로 종일 빗 줄기가 오락가락한다.

가뭄 끝에 내리는 비라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지만 후덥지근한 습기가 차오르니 기분이 별로다.

바야흐로 태풍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공식 기록 상으로 우리나라를 지나간 태풍 중에서 가장 강력했고 또 많은 인명(850명?)과 재산

피해를 남기고 간 녀석은 당연 '사라호' 다.

3.15 부정선거, 4.19 학생 혁명, 5,16 쿠데타 등 격동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59년 추석 날 새벽에

사라 호가 한 반도를 홀랑 뒤집어 놓고 지나갔다.

특히 경상도 동남부 지방을 쑥대 밭으로 만들어 놓고 사라졌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도 사라호 태풍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나는 당시 중 학교 1학년, 고3인 사촌 누나와 부산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혁명 직 전 과격한 독재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날카롭게 맞서고 있던 시절이라 학원 내에서도

이 기류가 상당히 강하게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교장 선생님이 단상에 올라 일장 훈시를 하는

일제의 잔재 아침 조례가 매주 있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훈시를 듣던 학생의 자세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불이 나게 교단을

내려와서는 해당 학생에게 발길로 걷어찼던 일명 '연산군' 곽 ** 교장 선생님이 계셨다.

아마 학원 내에서 일본식 독재를 행사하셨던 전형적인 분이셨던 것 같았다.

당시 하루뿐이었던 추석 휴일, 전 날 교정에 전교생을 소집시켜 놓고 일장 훈시를 하셨다.

훈시의 핵심은 만약 추석 다음 날 결석을 하게 되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퇴학을 시키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순진한 우리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그날 저녁 늦게 귓속에 쟁쟁히 남아도는 교장 선생님의 엄포를 담고서는 부모님이 기다리는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새벽, 그러니까 추석 날 새벽 잠결에 들러오는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T.V가 없던 시절이라 라디오 방송으로만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으나 지금처럼

어떤 태풍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바람의 강도는 점점 세어졌고 날이 밝아 오자 하늘이 구멍 뚫린 듯 폭우도 함께 솟아졌다.

뚜둑, 집 뒤의 미루나무가 부러지면서 뒷 부엌과 판자로 된 담장을 깔아뭉개 버렸다.

아직 설익은 앞 뜰의 감나무의 감이 모두 떨어진 건 벌써 새벽에 일어난 일이었다.

밖을 한 번 둘러보시고 들어오신 어머님의 한 마디

'애야, 큰 난리가 난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태풍이 걱정스러워 제방 너머 작물을 살피고 오시던 앞 집 아주머니는

제방을 넘어오다 바람에 50여 m나 날아가서는 무논 속에 떨어져 큰 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초가인 이웃집 지붕들 대부분은 바람에 날라 가 버렸다.

하도 경황이 없어 서로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내일 학교에 등교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후가 되니 집 앞마당으로 물이 밀러 올라왔다.

불어난 물에 장독대의 간장독이 둥둥 떠 내러 가다 서로 부딪쳐 깨어지고 ,,,,,,,,

오후가 되어 빗 줄기가 약해지자 나는 속 옷 바람으로 가방을 챙겨 들고서는 물속을 걸어 나왔다.

지대가 높은 신작로에 나와서 옷을 갈아입고는 부산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어머님은 위험한 빗속 길을 가지 말라고 말리고 나는 굳이 가야만 한다고

고집을 피우고 ,,,,,

한참 승강이 후 내 고집을 꺾지 못하자 사촌 누나도 마지못해 나를 따라나섰다.

부산행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약 6km 이상을 걸어 구포까지 나가야만 한다.

구포대교에 올라서니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각종 부유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각종 농산물과 뿌리째 뽑힌 나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제법 큰 오두막집도 통째로 떠내려왔다.

아직 살아있는 짐승도 나무나 부유물 위에 간신히 몸을 의지하고 떠내려오고 있었다.

1km 넘는 다리를 건너는데 이미 차량은 통제되어 다니질 않았고 다리 가운데쯤에

갑자기 불어난 급 물살에 교각 하나가 침하되어 30cm가량 내려앉아 있었다.

사람도 통제를 했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모하게 다리를 건너 구포에 도착했다.

다음 날 등교를 위해 여기까지는 무사히 나올 수 있었지만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다리는 이미 차량 운행이 통제되어 있어서 정기 운행 노선버스는 다니지를 않았다.

비와 바람은 그쳤지만 날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다행히 부산에서 올라온 버스가 다리를 건너지 못해 승객을 모두 하차시키고

회차를 하면서 부산행 승객을 태우기 시작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간신히 올라탈 수 있었고 뒤늦게 차지한 자리는 운전석 바로

옆 엔진 덮개 위였다.

버스가 출발한 후 지금의 모라동 직전 시골 포장길을 약 10분간 달려갔을까?

평평했던 도로가 갑자기 땅속으로 내려앉는 기분이 느껴졌다.

앞바퀴가 내려가니 운전수도 직감을 했든지 엔진의 출력을 순식간에 올렸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앞바퀴는 다행히 올라왔는데 잠시 후 뒤 바퀴가 걸려 버렸다.

붕! 붕! 붕! 차체가 서서히 내려앉으면서 놀란 승객들의 비명 소리로 차 속을 아수라 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위험을 직감한 나는 운전석 뒤에 세워진 손잡이를 양손으로 꽉 잡아

쥐고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차 앞부분이 서서히 허공으로 들려 올라 간 후 한참을 그대로 지탱하는 듯하더니

차체가 왼쪽으로 기울며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스러졌다.

나는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을 잃어버렸다.

금방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 짧은 순간에 느껴졌다.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며 만감을 교차시켰던 당시 상황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덕아! 덕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버스는 물이 찬 논바닥에 넘어져 있고

하늘 방향으로는 운전석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위에서 누나가 애타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틀어 봤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니 왼쪽 팔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다행히 운전석 제일 가까이에 끼어 있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차 밖으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제 살아났다는 생각에 한숨을 돌리고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휘영청 밝은 추석 보름달

이 동편에서 막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진심으로 느껴본 희망의 둥근달이었다.

하도 충격이 커서인지 지금도 보름달을 쳐다볼 때마다 그때 일을 기억하곤 한다.

이 사고로 현장에서 한 명, 얼마 뒤 병원에서 한 명 그렇게 두 명이 희생된 걸로 알고 있다.

부러진 왼 팔을 감싸 안고 내일 등교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밤 길을 20km 걸어서 다음 날

새벽에야 자취하던 부산 양정동에 있는 자취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비록 달밤에 스쳐 지나갔지만 피해를 당한 도로나 인근 주택들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지독하게 부산 지역에 몹쓸 짓이란 짓은 모두 다하고 지나간 사라호 태풍이었다.


다음 날 등교했냐고요?

곽 교장이 하도 무서워서 목숨을 걸고 등교를 시도했는데,,,,

다음 날부터 임시 휴교령이 내려 부러진 왼팔을 치료하면서 며칠간 쉬었고요,

연산군 곽 교장 선생님은 다음 해 일어난 4.19 혁명 직후 바로 학교에서 퇴출을 당했답니다.

2015,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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