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나는 누구인가?
한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딸들에게 많이 작명해준 제법 흔한 이름이다.
이 처녀의 성은 '최'고 이름은 '한나'이다.
그러나 28년간 자기 이름이라고 믿고 살아온 이 아가씨의 본명을 이제는 본인도 모른다.
자식을 버린 부모와 고아원에서 바꿔치기한 무지한 몇몇 인간들만 진실을 알뿐이다.
90년대 초반 가칭 대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 계급장을 막 달고 바쁜 나날을 보내던 때이다.
평소 국내에 디자인 전문 교육기관 설립 건으로 교신을 하고 있던 이태리 밀라노에 소재
디자인 전문대학 "NEWOVA ACADEMY"의 해외 교류 담당인 Mr, JOEL 씨로부터 장문의
Fax가 날아왔다.
일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호텔을 제쳐 두고 우리 집에서 며칠간 묵고 갔기 때문에 제법
친숙해진 네덜란드 출신 유대계이다.
언어에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있던 이 친구는 암스테르담에서 로마 문학을 전공하고
밀라노로 옮겨 이 대학에서 해외 교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내용 인즉은
자기가 알고 있는 여자 친구 중 한국으로부터 네덜란드에 입양된 에즈라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한국 친 부모를 찾아서 만나보고 싶어 하는데 당신이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에즈라는 그 당시 네덜란드 국적 항공사 KLM 근무하고 있었으며 나이는 28살이라고 했다.
그 외 이 아가씨의 출생지와 입양 기관, 날짜, 입양 과정 등 비교적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가능하다는 답신을 바로 보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강남의 어느 모텔로부터 나를 찾는 전화가 밤늦게 집으로 걸려 왔다.
'한나'가 휴가를 얻어 한국에 나와서 나름대로 친부모를 찾기 위해 노력을 하다가 힘이
부치니까 떠나기 3일 전 마지막으로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한 것이다.
그동안 홀트 아동 복지회, 방송국, 신문사 등을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과 함께 어울려서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보았다고 하였다..
퇴근길에 만나서 무조건 차에 태워 우리 집으로 다리고 왔다.
한국에 온 지는 약 일주일, 그동안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며
다니느라 '한나'의 심신은 매우 지쳐있었다.
예정된 출국 날짜는 이틀 후였다.
아내와 함께 그동안의 '한나'의 행적을 자세히 들은 후 바로 다음 날 하루 휴가를 얻어 '한나'의
출생지인 논산으로 무턱대고 차를 몰고 내려갔다.
논산이라면 육군 훈련소, 훈련소가 있는 위치한 곳이 연무, 무조건 연무읍으로 내려갔다.
그 당시 행정 전산망은 전국적인 Network이 제대로 갖추어 지질 않았고 경찰 전산망만 비교적
전국적으로 Network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연무대 근처의 한적한 파출소로 '한나'를 데리고 들어가서는 소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소장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든지 담당 직원을 불러서는 '최 한나'란 이름으로
가능한 서핑을 다해 보라고 지시를 내려주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최 한나'란 이름을 전국에서 여러 명을 찾아내더니 다시 본적이 논산인
사람으로 압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초조해하면서 한편으로는 궁금해하는 '한나'에게 아내는 경찰의 수색 방법과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었다.
오후 3시경 드디어 연무읍에 살고 있다는 한나의 작은아버지의 거처를 먼저 찾아냈다.
한나의 아버지는 오래전 이곳을 떠 낫기 때문에 이곳 전산망에 쉽게 걸려들지 않고 대신 아직도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나' 삼촌이 먼저 모니터에 뜬 것이다.
한편 이곳 논산에서 성장 후 군산으로 시집을 가서 살고 있다는 또 다른 "최 한나'의 거처도 확인을
하여 주었다.
경찰의 끈질긴 노력으로 얼마 후 한나의 작은아버지와 직접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내가 직접 수화기를 들었다.
의자에 앉아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진행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지켜보면서 몸을 떨기 시작하는
'한나'를 도저히 곁에서 볼 수가 없었다.
전화를 걸게 된 사유와 한나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서는
"그래 유, 한나가 어릴 적 그런 일이 있었어요"
"하도 살기가 힘들 때니까 외국에 보내면 밥도 잘 먹여주고 공부도 시켜 준다고 해서 대전에 있는
고아원으로 보냈는데,, 근데 얼마 있다가 다시 다리고 왔다고 하던데,,,,,,,,"
"전 잘 모르니까, 한나 아비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대화를 계속 이어 가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간신히 한나 아버지의 서울 집 전화번호만 챙겨 받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서울에 살고 계시다는 한나 어머니와 직접 전화가 연결이 되었다.
어머니 되시는 분은 한나의 입양 이야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전화를 끓어 버렸다.
우리는 옛 날 자신들이 버린 자식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줄로만 생각을 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 귀가한 한나 아버지와 다시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그동안 한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한나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묘한 표정과 충혈된 눈으로 나에게 차분하게 물어왔다.
"How can I do When I meet my parent at first time?"
큰 절, 얼떨결에 큰 절을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부모님을 만나면 먼저 "감사하다" 하고 그리고는 "사랑한다."라고
말할 거라고 하였다.
서울에 사시는 한나 아버님의 설명을 대충 정리해보면,
전북 익산에 살다가 이곳 논산으로 이주를 해서는 생업으로 조그만 과자 공장을 운영하였는데
벌이가 신통치 않았단다. 한나와 한 살 터울인 동생이 또 있었는데 해외 입양을 시키라는 당시
교회 목사의 권유에 못 이겨 대전에 있는 모 고아원에 두 자매를 보냈다고 했다.
밤마다 고아원으로 보낸 딸들이 꿈에 나타나서 집에 가고 싶다고 애원을 해서 삼 개월 후 고아원을
찾아가서 두 딸을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그래서 두 자매가 자기 품에 잘 자라서 큰 딸 한나는 군산으로 동생은 서울 전농동으로 시집을
가서 모두 잘 살고 있다고 하였다.
지나간 과정을 한나 아버지로부터 자세히 듣고 나니 처음 통화를 한 한나 작은아버지 얘기와
전화를 받기마저 힘들어하시던 한나 어머님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있는 '한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리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한나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챘는지 홀트 아동 복지회의 입양 당시
서류 사본을 가방에서 꺼내 놓았다.
자세히 읽어보니 애당초에는 한나가 입양 가기로 한 네덜란드 가정에 한나 동생도 함께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동생이 갑작스러운 중병으로 함께 보내지 못하고 한나 혼자만 보낸다는 토가 밑에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열심히 도와주시던 경찰 아저씨의 재빠른 판단은 이러했다.
한나 자매를 두고 네덜란드 입양 수속 절차를 추진하여 모든 관계 기관의 수속이 끝난 직 후
즉 출국 직전 한나 아버지가 고아원에 나타나서 두 자매를 집으로 데리고 가 버린 것이다.
다급해진 대전의 고아원은 한나만 다른 얘로 바꿔치기하고 동생은 중병을 핑계 삼아 보내지
않았다.
자매를 입양받기로 한 가정에 둘 다 바꿔치기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사이 날은 점차 저물어가고,
영문도 모르고 친 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소파에 앉아있는 '한나'는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짧은 영어 실력으로 이렇게 난감한 사안을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아무 말없이 당시 상황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어떻게 설명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한나가 상황을 알아들었는지 처음에는
'What? "
"What?"만 반복하더니 나중에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Mr. Kim , I never understand this matter. It's my story, not you."
한나의 얼굴은 실망과 분노와 의심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내와 함께 꼭 껴안아 주는 것 외는 아무것도 더 할 수가 없었다.
한나를 호텔로 보내지 않고 그날 저녁에 다시 집으로 데리고 가서 아내 곁에 재웠다.
친엄마를 만나지 못하고 실망과 분노를 안고 떠나야만 하는 한나를 그냥 내 버려둘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공항으로 향하는 한나를 정말 정성을 다해 꼭 안아주며 위로의 배웅을 하여 주었다.
한나가 떠나면서 남긴 한 마디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을 것이다"
후에 한나의 본을 찾기 위해서 홀트회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대전 고아원을 뒤졌지만
폐쇄된 지가 하도 오래되어 어떠한 한나의 진실한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종군 위안부 못지않은 상처를 어린 가슴에 남겨두고는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희희낙락하며 잘 들도 살아가고 있다.
종군 위안부를 강제로 농락한 일본 군인과 한 인격체를 통채로 바꿔치기한 놈과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2015년 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