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1)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에 대한 나름대로의 표상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 이 표상에 대해서 목사님의 심도 있는 주일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모태 신앙인으로 성장한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표상을 가졌었고
그동안 이 표상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여 왔는가?
소싯적엔 여름철만 되면 큰 둑이나 강가에 소를 몰고 나가 풀을 먹이는
목동 노릇을 하였다.
무료할 때면 풀밭에 누워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아니면 구름 속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동물들의
표상들을 찾아보기도 하였다.
하얀 옷, 가볍게 날리는 흰 수염,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인자한 눈 빛으로 조용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대충 이런 모습이 내가 그러 본 하나님에 대한 표상이었다.
때론 몹쓸 짓을 한 후 남몰래 감추고 있을 때는 제법 무섭고 근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다 점차 철이 들어가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이러한 습관들이 사라져 버렸다.
왜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표상을 제대로 그려보지 못했을까?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만 걸어왔기 때문인가?
아니면 세상살이가 너무 바빠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왔기 때문인가?
철이 들어가면서 자아 시현에 너무 메달 라다 보니 나를 창조한 조물주 아버지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표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난 주간은 새벽 묵상 때마다 이 하나님에 대한 표상을 계속해서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성경 말씀에는 하나님의 표상은 선한 목자로 때론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인자한 아버지로 표현되어 있다.
아버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그렇다면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표상은 그려 볼 수는 없을까?
나는 육신의 아버지, 즉 부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는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미 25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움보다는 존재의 사실로만
기억하고 싶은 그런 점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지난 주간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표상을 묵상할 때마다 살아생전 아버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아버님과 화해의 시간을 가져보라는 하나님의
Message가 계속 들려왔다.
지난날의 아버지에 대한 불편한 일화들을 다시 되새겨보며 아버지와 화해의
시간을 늦게나마 먼저 가져 보고 싶어 졌다.
그런 후에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표상을 한 번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 이발
우리 집은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논과 밭도 마을에서 제일 많았고 규모 있는 정미소도 운영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비록 빡빡 깎는 머리였지만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이발을 해야만 했다. 나는 이발할 때가 다가오면 항상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이발소는 학교가 있는 면사무소 앞에도 있고 5일장이 서는 장터 마을에도
있었다.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는 이동식 이발사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이발소를 이용하여 머리를 깎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호령에 따라 책보자기를 적당히 어깨에 둘러 써고는 우리 집 감나무 밑에
앉아서 머리를 깎아야만 했다. 집에 보관하고 있던 날도 제대로 서지 않은 일제 구형
이발기로 아버지가 손수 머리를 깎아 주셨기 때문이다.
집에서 머리를 깎는 창피함보다는 머리 깎는 것 자체가 더 고통스러웠다.
기계가 낡아서 머리카락을 제대로 밀어 넘기질 못하고 집어 뜯는 것이었다.
그나마 고통을 참고 머리 깎기를 다 마치고 나서 거울을 쳐다볼라치면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서툰 머리 깎기 솜씨 때문에 산 골짜기 모양이 내 머리 위에
고스란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내 머리 모양을 쳐다본 이웃집 누나의 일성
"덕아! 너네 집은 부잣집인데 네 머리 모양은 꼭 거지 집 같다"
절약이 몸에 배어있던 아버님이 실제 당신 몸으로 직접 나에게
실천하신 절약 방식 중 하나였다.
2016년 4월 10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