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4)
수학여행(4)
소풍은 소싯적 학창 생활의 즐거운 추억이요 꽃이다.
그중에 수학여행은 꽃 중의 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지내온 지난날의 아픈 추억들을
아직까지 가슴속에 담아 놓고 살아가고 있다.
어린 나이에 객지에서 생활하다 보니 봄가을마다 다가오는 소풍날은 즐겁기보다는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날이 된다.
여유가 있는 반 친구들은 맛있는 음식과 과일을 정성스레 준비해 와서는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서는 선생님께 상납(?)까지 하곤 했다.
평일날 도시락은 김치 몇 점에 멸치볶음이나 채 썬 오징어 졸임이면 족하지만
소풍날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가게에서 여러 가지 반찬을 돈 주고 살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자존심을 구기지 않고 소풍에 참가하는 궁여지책은 도시락 없이 빈손으로
따라나서는 방법밖에 없었다.
많이 사 가지고 온 친구들 틈에 끼어 적당히 얻어먹기도 했지만 내심은 무척이나
불편하고 속이 상했다.
중학교 시절 어느 소풍날 한 반 친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부터 소풍날이면 꼭 내 몫까지 두 개의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는
나를 챙겨 주었다.
결국 이 친구와는 고등학교까지 겹 동창이 되었고 멀리 떨어져 살지만 지금도 자주
안부를 주고받으며 가까이 지내고 있다.
문제는 중학교 3학년 봄 소풍, 즉 소풍을 대신한 수학여행이었다.
당시 부산에 소재한 중학교의 수학여행지는 대부분 서울이었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라 내 머릿속에는 서울이라고 하면 남대문보다는
선글라스를 끼고 시청 앞 광장에 서 있던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이
먼저 떠오르는 철없는 시절이었다.
안정이 덜된 시기라 미리 일정을 잡지 못하고 미루다가 불과 출발 며칠 전에 겨우
날짜를 확정 짓고서는 학생들에게 공지를 하여 주였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말을 이용하여 고향집에 다녀오곤 하는 시절이었다.
다녀온 지가 한 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수학여행 통보를 받은 다음 주말을
이용하여 서둘러 고향집에 다시 올라갔다.
"차비를 아껴야지, 뭔 일로 또 왔냐?"
"네, 저 저,,, 수학여행을 가게 돼서 ,,,,,,"
"어딜 가는데?"
"네, 서울로 갑니다"
"일 없다"
"네???"
"사내가 군대를 가게 되면 한양을 구경을 할 수 있을 끼고
그게 아니면 열심히 공부해서 한양으로 유학을 가거라!
그러면 한양 구경은 하기 싫어도 실컷 하게 된다."
"아버지 그래도 다른 친구들은 다 가는데요."
"일 없다"
다음 날 수학여행 경비를 한 푼도 타내지 못하고 빈손으로 부산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가고 싶은 맘은 간절했지만 워낙 짧은 기간이라 여행경비를 마련할 방도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55명인 우리 반에 꼭 3명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불참하게 되었는데 나도 영광스럽게
이 3명에 포함이 되었다.
반에서 상위급의 우등생이라 담임 선생님이 의아해하시면서 여러 번 참가 여부를
물어보았다.
선생님에게 함부로 인색하신 저희 아버지의 의도나 아니면 본인의 한 맺힌 원망을
털어놓을 수도 없고 정말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드디어 수학여행을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이른 새벽에 대절한 버스로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이 부산역으로 출발하는데 가지
않는 학생들도 같은 시간 즉 새벽 시간에 학교에 나오라고 하였다.
영문도 모르고 학교에 나간 불참 학생들의 기분을 선생님들이 조금만이라도 헤아려
주었으면 좋으련만,,,,,
동이 터 오자 여행을 떠난 동료들이 어지럽히고 간 운동장 쓰레기를 우리들 보고
줏어라고 하였다. 수학여행을 함께 하지 못한 낙오자 40여 명이 한 줄로 쓰레기를
주워나가면서 알고 있는 욕은 제다 뺐어내면서 쓰레기를 줍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눈물을 제법 많이 흘린 듯 지금도 당시를 회상하면
가슴이 시려온다.
다행히 운동장 한편에 대기하고 있던 수학여행 낙오자를 위한 버스를 타고 당시
금성사 선풍기 공장과 러키 치약 공장 등을 견학하였다.
위로의 무료 견학 때문인지 상처의 치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거칠어졌던
마음들이 어느 정도 진정된듯하였다.
참으로 지워지지 않는 어린 시절의 아픈 과거 사이다.
"아버지, 그때 그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서울
유학 와서 지금까지 서울 구경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
"정말 서운했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울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지난날 아버님에 대한 서운함을 모두 내려놓고
당신의 선한 모습만 기리면서 살겠습니다"
2016년 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