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

by 김 경덕

젊은 혈기가 넘쳐나서였는지 아니면 군중심리에 부화뇌동해서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데모를 선동 주도한 혐의로 경찰서 유치장을 두서너번 들락거렸다. 솔직히 데모는 열심히

참가하였지만 민주화에 대한 기본 이념은 제대로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았던 철부지 시절이었다.

67년 9월 이맘때쯤 학교 정문 앞에서 경찰들과 학생들이 몸싸움을 하던 중 경찰 간부를

폭행했다는 혐의로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성북 경찰서 유치장으로 넘겨졌다.

5일간 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를 당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유치장에 머물 때는 수사 경찰관 앞에 매일 불러나가 같은 조서를 반복하여 고쳐 써야 만 했다.

이 방법이 피고인들의 거짓 진술을 찾아내기 위해 같은 상황을 반복 진술하게 하여 거짓

진술을 찾아내는 수사 기법 중 하나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대로 검찰로 넘어가 정식 재판을 받게 된다고 담당 경찰관이 으름장을 놓았다.

5일째 날 이른 아침 경찰서 정보 과장실로 불러 올라갔다.

피의자 혐의에 대한 마지막 확인 과정이라고 하였다.

문을 열고 호위 경찰과 함께 들어서니 낯익은 얼굴 한 분이 앉아 계셨다. 당시 모교의 학생처장이셨던

윤 *창 교수님이셨다. 나에 대한 조서를 정보과장이 일차 검토한 후 기소 사실을 학교의 대관 창구인 학생처장 통보하였으며 그래서 학생처장께서 아침 일찍 직접 구명 차 경찰서로 달려오신 것이다.

이제는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이 시키는 데로 따를 뿐 어떤 개인적으로 대응할 방도가 전혀 없었다.


학생처장님께서 엄한 꾸지람을 저에게 하신 후 백지 두장을 내어놓으면서 반성문을 쓰라고 하셨다.

정상이 참작되는 것이니까 신중하게 쓰라고 조언도 하셨다.

지금은 어떻게 작성했는지 그 내용이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 당시 위기를 어떻게 하던

모면해 보려고 조금은 비굴하게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반성문을 한 번 읽어본 정보과장은

"처장님, 이 학생 향 후 지도 잘 부탁합니다 "라고

간단한 인사를 건넨 후 그 자리에서 바로 저의 신변을 학생 처장에게 인계시켜 주었다.

당시 학생처장님이 타고 오신 구형 지프차를 타고 학교에 돌아온 후 처장님의 걱정스러운 훈시와 함께

그동안 전후 사정을 간단히 설명해 주셨다. 경찰서 정보과장은 같은 대학교 출신이며 기소 송치 직전

처장님의 간곡한 요청으로 훈계 처분을 받게 되었다고 하셨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바로 처장님은 나을 당시 본교 ROTC 단장에게 인계하셨다.

단장님, 왈, 자네는 공부도 잘하고 신체도 건강한 것 같은데 왜 데모에 휩싸여 아까운 젊은 시기를

낭비하느냐, 그러지 말고 지금 당장 ROTC 지원서를 써라, 그러면 교육 훈련 과정이 끝나고 나면 좋은

보직을 추천해 주겠다고 회유를 하셨다. 지은 죄가 있어 시키는 대로 지원서를 작성해 놓고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영부영 지내던 중 겨울 방학을 맞이 하게 되었다. 답답하게 시골 고향집 골방 구들목을

지키면서 학훈단 훈련과 교내에서 선후배 간 절도와 예의 등을 곰곰이 상상하면서 과연 내가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망상에 빠져 들고 있었다.

답답할 때는 가끔 부산으로 내려가 친구들을 만나며 차도 마지면서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Y대 다녔던 고향 죽마고우와 함께 한 음악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맞은편 좌석에

해병대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 한 사람이 혼자서 차를 마시며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단도 직업적으로 해병대에 대한 궁금한 점을 묻기 시작했다.

"해병대 훈련이 힘들지는 않나요?"

"복무 기간은 어떻게 되나요?"

당시 해병대 사병의 복무기간은 25개월이고 육군은 30개월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이 장교의 설득에 우리 둘은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당시 육군은 지원 입대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바로 해병대에 입대하면 2년 만에 복학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 올랐다.

시골 출신인 우리들에게는 일 년 단축이라는 조건이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였다.

그렇게 하여 친구와 함께 해병대 지원서를 쓰게 되었고 23대 1의 대단한 경쟁을 뚫고 해병대에

입대할 자격을 취득할 수가 있었다.

속전속결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보다 더 속전속결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68,1,21 청와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내려온 1.21 김신조 특수부대다.

이 날이 바로 우리들이 해병대 입대 시험을 치른 후 합격자를 발표하였던 날이었다.

개구리 잡으려 갔다가 두꺼비는커녕 뱀꼬리를 잡은 꼴이 되고 말았다.


요즈음 모 장관 아들의 군 복무 중 휴가 특혜 문제로 연일 정치권 공방이 시끄럽다.

지나간 통계지만 국회의원이나 장차관 40% 이상이 이런저런 핑계로 군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이들의 자녀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핑계로 군 복무 의무를 면제받고

있다는 자료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당시에도 멀쩡한 젊은이가 부정하게 권력이나 금전을 이용하여 군 면제를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 복무도 제대로 필하지 않은 무지렁이들이 다들 모함과 이전투구로 혈전을 벌리고

있는 정치판 모습을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지켜보기에도 너무 역겹다.


조금이라도 일찍 학업을 끝내고 남보다 먼저 사회에 진출하려고 25개월을 기대하면서 해병대에

입대하였다가 김신조 형님 덕분에 36개월 꽉 채우고 겨우 제대를 할 수가 있었다.


"36개월 다 채운 군 복무가 억울하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결코 억울하지 않습니다. "

당시에 연속하여 일어난 일련의 국가 위기 사태들 1,21 공비 사태,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울진 삼척직 무장 공비 침투사건 그리고 KAL기 납북사건

거기다가 한참 격전 중이었던 월남 전, 저는 월남전에는 파병되지 못했습니다만......

등 수많은 사건들 한가운데 서서 직 간접적으로 참가하며 자랑스럽게 이 나라를 굳건히 지켰답니다.

아직까지 그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답니다.


2020,9,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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