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이성에 대해 예민하게 눈을 뜨기 시작했던 사춘기 시절 이 영화를 두 번이나 연이어 보았다. 누나가 이 영화를 먼저 관람하고 와서 이런저런 장광설을 하도 많이 펼쳐 놓기에 궁금증을 직접 해결해 보려고 누나 몰래 영화관을 찾아갔다. 당시 이 영화는 학생 입장 불가였다. 그렇치만 궁즉통이라고 다 통하는 방법이 있었다. 당시 상영관이 일류 극장이라 지금처럼 지정 좌석이 있었다. 우리가 자주 가는 삼류 극장은좌석번호가 없는 자유석으로 운영되었다. 뒤에는 임검석이 있었고,... 숨을 죽이고 한 번을 보았는데 여주인공 나타리욷이 너무너무 이쁘고 하는 연기마다 오금을 저리게 해서 도저히 한번 보고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서 나올 수가 없었다. 방법이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다음 상영을 시작할 때까지 숨어 있다가 영화 상영을 시작한 후 다시 들어가 맨 앞 빈자리에 앉았다. 그리하여 두 번 연속 감상, 감상이 아니라 여 주인공 나타리욷의 얼굴을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나온 영화가
바로 초원의 빛 이 영화이다.
쓴웃음만 나오게 하는 지난날 추억이다. 그러나
초원의 빛도 사라져 버리고 없는 지금여기에는 불어오는 초겨울 바람만 무릎을 시리게 한다.
어쩌면 가슴까지도 시리게 할 것 같아 등을 슬쩍
돌려 본다. 지금은 초원의 빛 꽃의 영광도 모두 떠나간 빈자리이다. 이제는 나만의 공간에 홀로 앉아 아직도 남아 있는 나의 작은 씨앗을 만지작거려 본다. 끄집어 내어놓고 이제부터 이것을 열심히 가꾸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때론 초라하기도 때론 안쓰럽기도 하였지만우리가 살아온 지난 세월은 스스로에게너무나 수고가 많았다. 정말 힘들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었다. 내것은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가꾸어 보지도 꾸며 보지도 못하고 모두 놓쳐버렸다. 돌아보니 여기저기에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많이 남아있다. 다른 어느 것보다 먼저 내 것부터 어루만져 주고 싶어 진다. 이것을 자가 치유라 하나요? 아니면 자기 용서라 하나요? 아래위 전후 죄우 챙겨주다 보니 내것은 아직도 아물지 않고 그냥 그대로 남아있다. 늦었지만 이것이 나이 듦의 미덕인 것 같기도 하여 서둘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늙어감이 꼭 두렵거나 슬픈 일 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
"초원의 빛 꽃의 영광이여 그 시간들을 다시 볼 수 없다한들, 어쩌리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얻으리라"
윌리암 워즈 워드의 연작시의 한 부분이지만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얻으리라" 대목에서 오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내일을 힘차게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쓰다 보니 자조적인 한탄 글이 되어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