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귀한 만남이 있었다. 60년 전 3평 남짓한 작은 자취방에서 함께 고락을 같이 한 형들과 헤어진 후 처음으로 만나기로 한 자리였다. 두 형들과 부산에서 함께 자취를 한 시기는 5.16 혁명 일어난 1961 전후이다. 두 살 위인 사촌 형과 형과 동갑인 고향 바로 앞집 정*형 이렇게 세명이었다. 지금의 범천1동 자리에 있었던 '와라 바시' 사택이란 일본식 이름이 붙어있던 동네에서 우리는 살림을 차렸다. 아마 일제시절 어느 회사의 사택이었거나 공장이었던 건물을 일반 주거용으로 개조하였던 것 같다. 7,80m 정도 되는 학교 교사 형태와 비슷한 단층 건물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한 10 여동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집단 주거지였다. 각 건물의 가로로 가운데를 가로막고 세로로 10m 정도의 폭으로 한 가구씩 나누어 놓았다. 한 동이 15여 가구로 방 두 개에 조그마한 부엌과 마루 그리고 3m 정도 깊이의 마당이 전부였다. 우리가 자취했던 방은 줍은 마당을 또 반으로 나누어 들여놓은 작은 월세 방이었다. 강제로 나누어 놓은 집단 주거지라 집마다 개별 화장실이 없었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공동 화장실을 사용해야만 했기 때문에 상당히 불편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요즈음으로 치면 서민용 평면 아파트인 셈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살기가 힘들었던 60년대 초반 시절이었다.
고생했던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사촌 형을 모시고 약속 장소인 김해 중앙 교회를 향하여 이른 새벽에 집을 나셨다. 고향 땅의 산은 분명히 옛 산인데 들은 옛 들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은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옛 길들을 이제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의 만난 재회의 기쁨을 맘껏 나눈 후 우리는 정*형이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정*형은 일찍이 이 도시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부 시장까지 역임한 이 지역의 유영 인사이시다. 사촌 형은 대학 재학 중 장교로 군에 입대하여 초대 육군 항공학교를 졸업한 후항공기 조종사가 되었다. 정년까지 조종간을 잡다가 예편 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탄탄하게 사업 기반을 잡은 해외 교포이시다. 막내인 본인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서울로 올라와 버렸기 때문에 그동안 형들과 이러한 만남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다.
우리 앞에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을 마주 대하고 보니 자연스레 그 옛날 힘들게 자취하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식탁 위로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매 주말마다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고향집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부모님과 함께 드린 후 한 주일 동안 먹을 쌀과 김치 그리고 약간의 부식비를 받아가지고 일요일 오후나 월요일 새벽에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당시 주 부식은 밥과 김치 한 가지뿐이었다. 각자가 각출한 얼마 되지도 않는 부식비로 가끔 시장에 나가서 생선이나 김을 구해 오기는 하였지만.... 어떻게 그렇게 먹고 견디고 버티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무척이나 궁금하다.
자취하는 동안 우리끼리만 간직하고 있는 평생 잊지 못할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이제는 이 이야기를 풀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아 오늘 여기에 풀어 본다.
어느 날 사촌 형이 식사 당번을 하는 날 가까운 난전 시장에 나가 꽁치 몇 마리를 사 와서 꽁치 찌개를 꿇여 놓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비린 맛이라 허겁지겁 몇 수락 뜨는데
정* 형 왈 "야, 덕아? 그렇게 빨리 먹어 버리면 어떡하냐? "어떻게 먹어야 하는데?" "오늘 저녁은 우리 그냥 국물만 먹자. 그리고 내일 아침 다시 물을 붓고 끓이면 한 끼 더 먹을 수 있다. 아이가?" "???? 어어" 정말로 기막힌 발상이었다.
웃지 못할 해프닝은 또 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김에 기름을 발라서 먹는 구운 맛김보다는 파래가 푸릇푸릇 섞여 있는 생김을 많이 팔았다. 이 김을 시장에 나가 사 와서 연탄불에 살짝 구어 사등분하거나 솔직히 말해서 사등분해서 먹은 기억은 한 번도 없다. 6등분을 하거나 때론 8등분 해서 뜨거운 밥을 싼 후 그냥 생간장을 살짝 넣어 먹었다. 이렇게 맛있게 먹고 있는데 어느 날 우리 주방의 시 어머니요 살림꾼인 정*형의 기발한 제안이 다시 밥상 위에 떨어졌다. "우리 이제부터 김을 이렇게 한번 먹어보자" "어떻게 먹는 건데?" "처음에 먹을 때는 김 위에 밥을 싸가고서는 그냥 밥만 먹자 그리고 두 번째 먹을 때는 밥이랑 김이랑 같이 먹자" "그렇게 하면 김을 아껴 먹을 수 있다 아이가?" '와???????"
이 이야기를 미리들은 아내가 김을 먹을 때 가끔 한마디 한다. "당신 많이 묵어라! 한꺼번에 두장씩 먹어도 괜찮다."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넘기면서 오늘날까지 잘도 견디면서 살아남았다. 어느덧 칠십 대 중반을 넘어선 중 노인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이런 아린 기억들이 모두 다 이름다운 추억으로 변해있다. 두 형 모두 아직도 건강들 하시니 남은 여생 더욱 건강 조심하시고 우리 자주 만나서 이제는 생선찌게도 마음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