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연륜이 깊어지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번 생사의 기로를 경험하게 된다. 어제 대구 누님 댁에서 형제자매들이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하였다. 구정 전 후로 아버님 어머님의 기일이 있기 때문에 겸사겸사로 마련한 자리이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만나 자연스럽게 오고 간 이야기의 대부분은 소싯적 고향에서 있었던 추억거리 었다. 7년 차 손위 누님으로부터 여러기지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가 있었다. 그동안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던 사건들을 많이 바로 잡을 수도 있었다.
나는 10살이 될 때까지는 엄청나게 허약한 약골이었다 머릿속에 지니고 있었던 기억으로는 생사고비를 넘긴 적이 두 번이었는데 이번에 누님으로부터 한 가지를 더 들을 수 있었다.
첫째는 소아적에 나는 경끼가 무척 심했다.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뺏기만 해도 악하며 기절을 쉽게 해 버렸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절한 나를 깨우기 위해서는 빰을 때리거나 그것도 안되면 얼굴에 찬물을 수 차례 뒤집어 쉬워야 겨우 깨어나곤 하였다. 제대로 사람 구실을 못할 것이라고 즉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이웃 어른들이 걱정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마침 당시 동래에서 시집와 사시던 친구 어머니의 권유로 동래에 있는 용한 한 의사를 찾아가 침을 맞고 완치가 되었다. 그 한의사도 그냥 두었으면 얼마 더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는 7 곱살 때 나는 법정 전염병인 못쓸 놈의 디프테리아에 감염이 되었다. 53년 6.25 종전 직전 부산 국제시장에 초 대형화재가 발생하였다. 전쟁 중이라 병원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 시절에 그 위험한 전염병이 나에게 찾아왔다. 목이 부어오르면서 기도가 막혀 죽는 극히 위험한 소아병이다. 마침 이웃 마을에 피난 와서 간단한 진료를 하고 있던 의사 득분에 약간 변질된, 이 치료약은 저온 보관이 필수, 주사를 맞을 수 있었지만 그것도 단 한번뿐이었다. 당장 부산의 큰 병뭔으로 가서 신선한 치료 주사를 맞지 않으면 며칠 더 버티기가 힘들 것이라고 하셨다. 아버님은 급한 마음에 당시 중학생이었던 누나 등에 나를 업게 하고 늦은 시간에 부산으로 내려갔다. 종전 직전 거기다가 초 대형화재로 부산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혼란 그 자체였다. 밤늦은 시각 물어물어 이 병의 치료 주사약을 보유하고 있다는 조그마한 어느 병원에 찾아 들어갔다. 마침 의사는 밖으로 왕진 나가고 없었다. 한참 만에 돌아온 의사는 전염병 환자를 그냥 진료실에 대기시켰다고 간호사를 많이 야단쳤다고 하였다. 주사를 한 대 놓아준 후 내몰듯이 밖으로 내 보내며 증세가 아주 위독하니 내일 이침 다시 오라고 하셨다. 병뭔 문을 나섰지만 문제는 그날 밤 잠자리였다. 화재로 여관도 귀했지만 방이 있어도 전염병 환자라고 방을 내어주지 않았다. 밤늦게 헤매다가 파출소, 당시는 전시라 헌병이 파출소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를 찾아가 통사정을 하였다. 우리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헌병이 화재가 난 후 천막으로 임시로 설치해 놓은 시장통 안 어느 가게에 우리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5월이라 다행히 밤 추위를 견딜 수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어젯밤 맞은 주사 덕분에 나의 숨소리가 많이 안정돼 있었다. 아침에 서둘러 그 병원에 다시 찾아가 주사를 한 대 더 맞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서 김해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나의 숨소리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구포에 내려 집에까지 오는 6km 시골길을 혼자서 걸어갈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고 한다. 죽은 꼬마가 살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때 의사는 하루만 늦었어도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을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급한 환자였다 라고 하였단다.
셋째는 부산 복음병원의 장기려, 6.25전 김일성 주치의였다, 박사도 포기한 괴질 일본 독감이다. 한 달 동만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더 이상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니 집으로 데리고 가서 편안하게 쉬게 하라며 강제로 퇴원을 시켰다.
말이 쉬는 것이지 죽기를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마치 지금의 코로나 19처럼 일본을 통해 전파된 새로운
유행성 독감이라 이 병의 증세와 치료 방법을 아는 의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며칠 후 당시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일교포 출신 의사를 만날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