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 경덕 Aug 08. 2021

멋쟁이 노인

비판

우리 사회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유지  계승하고자 하는 다수인 보수와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소수인 진보의 갈등 속에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

사회 어느 한 분야의 정책이나 정치적 논쟁에 문제가 생기면 보통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찬반 대열에 편승을 하게 된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항상 논쟁을 주도하는 지도자 그룹이 있다.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 각 분야를 이끌고 있는  이 지도자 그룹은  많아야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어떤 정책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이념이 다르면 무조건 지도자부터 폄하하기 시작한다.

과연 이 모두가 상위  1%인 이 지도자들만의 잘못 일가?

1%면 현재 우리나라의 인구로 환산하면 50만이 조금 넘는다. 경우에 따라 상위 1%에 나 자신이 속할 때도 있고 속하지 못할 때도 있다. 자신이 상위 그룹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잘못된 이 사회 문제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만 단정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야기된 사회 문제에 대해 일면의 책임의식을 스스로 조금만이라도 느낄 수는 없을까?


최소한 모든 분야의 상위 1%가 아닌 20%가 공동책임 임을  공감하고 양보하지 않으면 이 사회의 불평등과 갈등의 문제를 결코 넘어설 수가 없을 것 같다.


상대가 망하라고 하는 비판과 잘되라고 충고하는 비판은 차원이 다르다.

이런 악의성 비판을 보수 언론이 현 정부를 비판하며 공격하는데 너무나 빈번하게 활용하고 있다. 비판이란 이름으로 정치적 반대편을 무소불위의 언론이라는 칼을 사용하여 난도질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비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세력은 대부분 상위 20%에 속하는 기득권자 들이다.


지금은 비록 진보세력이 청와대와 국회를 장악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보수 우위이고 조중동과 같은 보수 카르테의  힘이 엄청나게 사회 전반의 흐름을 여론으로 주도하고 있다.


얼마 전 제일 야당의 비대위원장이

"앞으로 보수란 말 쓰지 말자"라고 하였는데 왜 그가 이런 말을 했는지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미래에 대한 어떤 예측이나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과거만 집요하게 파고든다.

다음 세기를 책임질 신세대가 변화하지 못하고 비판만 일삼는 낡은 보수를 얼마만큼 무시하고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60대 중반 이후의 원로층과 각 분야의  상위 그룹층은 아직도 모든 분야에서 보수가 우위이고 이 사회를 유지해나가는 기득권을

자신들이 쥐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다만 대통령( 청와대)과 국회의원 수만 작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주의 아래에선 보수가 메이저이고 진보는 마이너이다.

서로 공존하며 시대의 요구에 따라 그 상황에 따라 적합한 조타수만 바뀔 뿐이다.

설령 추구하는 노선이 다르다 하더라도 선의의 비판과 충고는 국가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

더 큰 밑 그름은 발생한 사회 문제에 대해 책임을 서로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욕하고 폄하하기보다는 네가 양보하고 실천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가 아닐까?

아직까지 많은 7,80대 노인들까지 기득권을 계속 손아귀에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러면서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말한다면 누가 이 노욕이 흘러넘치는 노인들의 말을 경청하고 존경할 수 있겠는가?


제발 나무의 오래된 심재처럼 이미 고형화 되어 쓸모없어 보이지만 나무의 중심에 자리 잡은 그 자체만으로 나무가 똑바로 서게 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할 수는 없을까?


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대권 경쟁을 앞두고 여야를 막론하고 홍수처럼 어닥칠 이념과 정치 패권 논쟁, 생각만 해도 머리가 벌써 아파온다.


   2021,  8,  8

작가의 이전글 덕풍계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