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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경덕 Aug 25. 2021

울릉도 2

울릉도 2

60년대에는  많은 제주도 해녀들이 여름 한 철 여기에 들어와 성게잡이를 하였다.  

한 철 잠깐 이곳에 머물다가 돌아가는 해녀들이지만 마을의 빈방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에 머물지 못하고  바닷가 가파른  비탈에 초라하게 움막을 짓고 기거하고 있었다.

이곳 인심이 이렇게 야박한가?

해녀들의 임시 거처인 움막이 너무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서 어느 날 마을에 사시는 할머니에게

한번  여쭈어 보았다.

할머니 왈

"저년들이 이 마을 남자들을 모두  동서로 만들어 놓았어."

"그래서 마을에서 쫓아 내 버렸다네,

  다시는 마을에 얼씬도 못해"


누구의 잘못 일가?

오지 섬마을에서 하늘과 바다만 바라보고 살아온 이곳 남자들 일가?  

아니면 물길질 하여 돈을 벌려고 들어온  외지 여자들 일가?

웃어넘길 수 없는 기막힌 사연이 볼품없는 움막 속에 그대로 감추어져 있었다.

낮에 쟁기질 한 남정네는 밤에는

새로운 뱃길질이 그리웠을 터이고,

낮에 물길질 한 여자들도 밤만 되면

새로운 물질이 역시 그리웠을 터인데.........

이렇게 그리운 사람끼리 눈이 맞아서 만난 것도 죄가 되었든가?


30여 호가량 되는 이 마을에서 일어난 집단 치정 사건은 쉬쉬하며 아무 일 없었다는듯이

덮어버리고 약자인 해녀들만 마을에서 기거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66년 대학시절 하계 봉사할동을 하려고 이 마을에 들어갔다. 우리는 무시로 어느 쪽이든

찾아가서 만날 수가 있었다. 약간의 생필품이나 구급약을 가지고 거의 매일 해녀들의 움막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낫 간지러운 거래였지만 우리가 가지고 간 보잘것없는 생필품 몇 점과

그들이 물속에서 힘들게 잡은 자연산 전복을 매일 물물 교환하였다.


당시 이 마을에 가려면 오직 소형 어선만으로 도동에서 2시간 이상 달려가야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복은 직접 자신들이 먹을 것 외에는 잡지 않았다.

잡을 수는 있었지만 판로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도 물속에 들어가면 작기는 하지만 몇 마리는 쉽게 건져 올릴 수가 있었다.

그 대신 성게는 잡자마자 알을 까서 염장을 해  놓았다가 일본 수출용으로 나가기 때문에

큰돈이 된다고 하였다.

물속에서 성게 채취 작업이 끝난 후 뭍으로 나오기 전 우리들에게 건네주기 위해 실한 놈만

덤으로 한 바구니씩  잡아서 올라왔다.

우리들은 이렇게 물물 교환한 크고 싱싱한 자연산 전복을 한 주일 내내 포식을 할 수가 있었다

이런 기회가 이제는 살아생전 나에게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섬을 떠나는 날에는, 물론 대가는 지불, 햇볕에 살짝 말린 전복을 한 보따리 따로 챙겨 나와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효도 선물까지 하였다.

이제는 모두 다  지난날들의 아련한 추억 속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다"라는

옛 시인의 노래처럼 울릉도

마저도 산은 물은 옛  모습 그대로지만 이제는 사람도, 인심도, 심지어 바닷물 속까지도

옛 울릉도가 아닌 것 같다.

옛날의 때 묻지 않은 당시의 울릉도 모습이, 사람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지금이라도 당장 틀고 일어나울릉도로 다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부풀어 오른다.



          2016,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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