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2)

by 김 경덕

은퇴(2)

당시 우리들의 근무처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광화문과 무교동에 있었다.

본인의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된 손아래 동서가 결혼 후 이듬해 어느 날 점심을 같이

하자는 전화가 걸어왔다.

인사차 내는 점심으로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느닷없이

"형님, 저 회사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중매쟁이에게 하는 통과의례에 불과한 일방적인 통보였다.

회사를 그만두려고 한 결심 전후의 사정을 듣고 보니 이미 오래전에 작심을 한 것 같아

비집고 들어가 말리고 자시고 할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족 생계는?"

쥐꼬리만 한 4년 차 퇴직금과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세금을 찾아 절약하여 쓰면

3년 동안 학비와 생활비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마침 입학하고자 하는 학교가 처갓집 근처라 처갓집에 비어있는 방으로 살림을 옮기면

된다나 뭐나,,,,,,,,듣고 있는 나 역시 답답하기가 그지없었다.


"형부, 나 미쳐!"

"또, 왜?"

처갓집은 삼양동 빨래 꼴이란 동네로 경사진 길을 한창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간 어느 해 초가을 하굣길에 리어카에 연탄을 가득 싣고 힘들게 올라가는

연탄 배달를 만났단다.

"아저씨, 조금 밀어 들일까요?"

한참을 뒤에서 밀어주며 올라가다 보니 바람에 날린 연탄 가루가 땀과 범벅이 되어 본인의 옷과

얼굴도 연탄장수 아저씨처럼 되어 버렸다.

흰 남방셔츠에 땀과 범벅이 된 연탄가루,,,,,,

상상만 해도 재미있는 그림이 절로 그려진다.

"미치지 말고 참어, 모두 네 업보라고 생각해."

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공부한 대가로

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독일 유학과 대 도시에서의 목회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접고 당초

목표대로 시골 목회를 하기 위해 경북 금능 군으로 내려갔다.

부임 얼마 후 하도 궁금하여 짬을 내어 찾아가 보았다.

연로한 교인 십여 명에, 낡은 교회 건물은 폭삭 삭아있었고 사택이랍시고

기거하는 집은 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움막에 더 가까웠다.

부임 후부터 비록 낡은 교회였지만 해가 갈수록 윤기가 더해졌고 교인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던 어느 해였다.

"형님, 교회를 신축하고 싶은데 ,,,,"라며

교회 신축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를 조심스레 문의해 왔다.

"건축비는?"

총 건축 비용의 50% 이상 비축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시작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특히 재정이 빈약한 농촌 교회는 더 힘들 것이라고,,,,,,,,,

자세히 물어보니 비축되어 있는 현금은 희망하는 건물 건축비의 10%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여 년이 지났을까?

2000년대 초 김천 지역에 엄청난 폭우가 솟아져 큰 물난리가 났다.

"형부, 나 죽어,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주일날 오후 정말로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또 왜? "가 아니라

상대를 진정시킬 야 할 만큼 다급한 목소리였다.

"천천히, 천천히, 얘기해"

갑자기 교회 앞을 흐르는 갑천이 범람하여 마을을 덮쳤는데 교회도 다

잠기고 자기들은 성경 책마저도 들고 나오지 못할 만큼 상황이 다급해서

몸만 겨우 피신했다고 했다.

긴급 물품을 몇 가지 챙겨 다음날 아내와 서둘려 차를 몰고 내려갔다.

곳곳에 도로가 유실되어 있어서 돌고 돌아 현지에 겨우 도착하여보니

정말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마을 전체가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물은 처마 밑까지 올라갔다가 빠졌는데 시꺼먼 뻘이 교회나 사택 할

것 없이 허리만큼 차 있었다.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날 늦게 수해 복구를 지원하기 위해 군 병력이 긴급 투입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서둘러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새로 지은 구성교회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런 마음을 달래고자 그곳에 갈 때마다 아침저녁 시차를 두어 가며

교회 전경을 카메라에 담아 놓았다.

어느 교회나 하나님이 지으시지 않은 교회가 없겠지만 이 교회만큼은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교회라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쓰러져 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한 간절한 장 목사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셨다.

그것도 일상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천재지변으로,

수해를 당한 후 각계각층에서 답지한 수해 복구비, 교단의 수해 지원금,

동료 친지들의 격려금, 이름 없는 독지가들의 후원금, 본 교회 출신 건축

설계사의 기부 설계, 이런 것들이 모여서 즉 협력하여 선을 이룬 것이다.

다음 해에 폐허가 되었던 수해 현장에 아름답고 정갈한 오늘의 구성교회가

새로이 세워지게 되었다.

교회의 외관도 소박하고 아름답지만 드러나지 않은 건축 과정이 더더욱

아름답게 교회 속에 숨겨져 있다.


이런 교회를 30년간 정성을 다해 섬겼다.

믿지 않은 이웃 주민들도 함께 섬겼다.

아직도 정년이 남은 60대 중반 이건만 후배 목사에게 미련 없이 물러주고

오늘 동서 목사는 이곳을 떠났다.

떠나는 날 뜨거운 눈물로 손을 놓지 못하는 시골 할머니들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매년 두서너 번 이상 내려갔던 이 교회를 마지막으로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이 시대의 또 다른 목회자들의 허상을 동시에 머릿속에 그려보니 더욱 마음이

무거워진다.


2017,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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