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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향(暗番)

by 김 경덕

암향(暗番)

梅花의 계절이 돌아왔다.

매화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지닌 교수였던 친구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전국으로 매화 기행을 떠난다.

여태 전 이 친구를 따라 2년 연속 남도로 매화 기행을 다녀왔다. 서당견능풍월(書堂犬能風月)이라고 이제는 친구 덕분에 매화에 대한 관심이 쾌나 커졌고 얕으나마 감상하는 방법도 제법 익힐 수 있게 되었다.


暗番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으스름한 달빛 속에 풍기는 매화의 향기는 강하지는 않지만 조용하고

은은하며 깊다.' 암향을 묘사한 옛 시인의 시 한 구절이다.


마음 준비도 전혀 없이 암향을 내심 목표로 하고 첫 해에 전남의 남도 5매를 찾아 내려갔다.

화엄사의 '흑매', 야매, 녹매를 시작으로 담양 민가의 '계당매', 백양사의 '고불매'를 친근하였다.

전남대의 '대명매'와 선암사의 '떼매'는

일정이 여의치 않아 다음으로 미루었다. 성급하게 암향을 은근히 기대하였지만 심매의 경지가 미천하여 첫 해에는 암향은커녕 매향조차도 제대로 맡을 수가 없었다.

백양사 구층암 뒤편 야산에 자리 잡은 야매의 연한 향기가 바람결에 희미하게 날려오는 것만 겨우 느낄 수가 있었다.

암향을 탐하지 못한 아쉬움을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해에는 또 다른 3매를 찾아 경남 산청으로 내려갔다. 산청 3매는 단속사지의 '정방매',

조식 사당의 '남명매' 그리고 남사 예당촌의 '원정매'를 말한다. 첫 기행에서 실패한 후 2차 매화 기행에서는 암향에 대한 기대마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느 선인의 글에 암향을 제대로 맡고 느끼려면,

'정중동 하고 매화 앞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춘 후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기다려야 한다. 바람과 소리에 따라 매향의 농도가 달라진다. 첫 향은 아무래도 진하고 주변의 다른 향이 섞여있어 암향이 되지 못한다.

첫 향이 지난 후 잠시 기다리면 다시 풍겨오는 옅은 순수한 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암향이다.'라는

암향 체험담을 읽은 후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상당한 수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남도로 내려갔기 때문에 아침 10시경에 산청에 있는 남사 예담촌에 도착하였다. 예담촌은 고택만으로 구성된 전통 한옥 마을로 여기에 있는 매들을 원정매라 한다. 시간도 이른 오전 10시가 갓 지난 후라 탐방객도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마을은 이제 막 아침잠에서 깨어난 듯 이른 봄의 따스한 아침 햇살로 세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낡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오래된 매화 고사목이 눈에 들어왔다. 족히 4-5백 년은 되어 보이는 고사목 밑동에서 나온 자매의 새 가지가 보였고 거기에 연하고 여린 매화 몇 송이가 달려 있었다. 가슴 높이 정도에 달려있는 몇 송이 매화는 애처롭게 보일 정도였다.

오래된 높은 돌담 속에 둘러싸여 있어 뜰안은 조용하고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았다. 잡향이 날아 올 다른 나무나 꽃도 주변에 보이지 않아 다른 향이나 냄새가 번접할 여지가 별로 없어 보였다.

함께한 일행들이 먼저 여기를 돌아보고 떠난 후라 뜰 안에는 나 혼자 뿐이었으며 따스한 봄 햇살만 가득 차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니 뭔가 모르는 진한 향이 내 몸 곁을 감싸고돌았다. 한참 기다렸다가 혹시나 하고 손바닥으로 천천히 꽃 앞으로 다가가 허공을 한번 갈랐더니 첫 향 뒤에 따라오는 기막힌 옅은 향이 코 속으로 은근히 파고들어 왔다.

맛이 달랐다. 느낌도 다르고 향도 달랐다.

바로 암향이었다.

암향부동조삼월(暗番浮動朝三月)이었다.


2025,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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