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란
'풍란은 원래 열대지방, 적도 근처에 살던 식물이다.
그런데 열대성의 거대한 나무들이 풍란이 살던 세상을
모조리 빼앗아 버렸다. 이 큰 나무뿌리는 욕심 사납게 모든 땅을 차지해 버렸고 그 거대한 나무 잎새들은 하늘까지 모조리 가리어 버렸다.
사실 풍란은 조그만 땅부스러기만 있으면 족한 작은 식물이지만 그 조그만 면적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풍란은 할 수 없이 거대한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갖은 고생 끝에 그 거목의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간 풍란은 하늘을 향해 다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뿌리를 뻗치고 구름 속에서 영양분을 빨아들여서 풍란은 세상에 다시없는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문학사상, 안병무-
십수 년 전이다.
꽃시장에서 풍란 한 촉을 덤으로 얻어 왔다.
작고 여리고 가냘픈 식물이었다.
감싸고 있던 신문지를 펼치니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바로 분에 옮겨 주었지만 잃었던 생기를 오랫동안
찾지 못했다.
어느 날 자생 풍란이 바위틈에 붙어서 자라는 그림을 보았다. 마침 집에 완상용 큰 숯덩이가 하나 있어 거기에다 옮겨 심어 주었더니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숯덩이에다 물만 뿌려 주었다.
키만 야금야금 자랐다.
분명히 꽃이 핀다고 하였는데 그리고 꽃향기가 기막히다고 했는데 꽃을 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꽃구경에 대한 기대는 잊어버렸다.
대신 허공을 향해 푸르스름한 뿌리만 몇 가지 뻗어 나왔다.
금년 봄 다른 분에 뿌려주려고 화초용 액상 영양제를 사 왔다. 마침 관엽식물용도 있어 이 녀석에게도 함께 꽂아 주었다.
보살핌에 대한 보답인가?
아니면, 그동안 허기짐에 대한 화풀이인가?
지난주에 이상한 속대가 소옥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오늘 풍란꽃 5송이가 만개를 했다.
속살처럼 맑고 깨끗하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지 밤에 활짝 피었다가 낮에는 얼굴을 살짝 가린다.
새벽에 베란다로 나서면 풍란의 은은한 항기가 온몸을 감싸고돈다.
아내왈,
'나에게도 그렇게 정성을 들여봐!,
더 좋은 향기가 날 테니'
글쎄?
하늘을 향해 뿌리를 뻗치고 구름 속을 헤매다가
무지한 주인 때문에 그나마 뒤늦게 세상에 다시없는
희한한 꽃을 피운 것이다.
15년만 핀 우리 집 풍란꽃 구경해 보세요.
그리고
항기도 맡아보세요.
2025, 6,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