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1)
일본을 강타한 태풍의 간접 영향으로 폭우가 내려 섬 전체에 피해가 많다는
보도가 계속 나온다.
지난주 방문 때 지나쳐 간 사동 지역과 터널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남아있는데
화면에 나오는 이곳은 산사태로 인하여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울릉도는 지난주 방문이 다섯 번째이다.
처음 방문은 1966년 여름이었다.
당시 울릉도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신비의 섬이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봉사 활동 지역이 울릉도로 결정되자 제일 먼저 참가 신청을 하였다.
야간 완행열차로 용산역을 출발하여 대구에서 한번 열차를 바꿔 타고 다음날 아침 무렵에야
겨우 포항역에 내릴 수 있었다.
당시에 한 주에 두 번 섬으로 들어가는 청룡호는 500톤 급으로 화물과 승객을 동시에 수송하는
다목적 선박이었다.
저녁 8시에 포항항을 출항한 이 배는 밤새 파도를 헤치며 10시간 이상을 달려 아침 7시경에야
도동항에 들어갔다.
땀 냄새가 진동하는 일반 선실에서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갑판에 쌓아둔 화물 뜸에서 밤
추위에 떨며 지새운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한 여름일지라도 심해 밤바다의 추위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서로의 체온을 유지하려고 꼭 껄어 안고 밤바다를 건너간 기억이
머릿속에 아련한데,,,,,,,,,,,
도동항에 내리자마자 언 몸을 녹일 뜸도 없이 군청에서 마련해준 똑딱선을 타고 다시 두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은 지금의 북면 죽암 마을이었다.
첫날밤은 밤바다가 우는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은 바람이 다소 강하게 불어 모든 배의 출어가 금지되어 있었다.
장거리 여행에 모두 지쳐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데 잠결에 들어보니 산이 무너질듯한 아니면
섬이 우는 듯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바다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론 산사태가 나는 소리 같기도 하여
도통 무슨 소린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숙소가 바로 바닷가 벼랑 밑에 자리 잡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흙더미가 집을 덮칠 것 같은
불안감에 더더욱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 부엌을 건너 맨 끝방에 주무시던 여든을 넘기신 영수님 부부를 깨웠다.
워낙 오지의 작은 교회라 목사나 전도사 대신 나이 많으신 이 분이 교회를 맡아서 관리도 하시고
설교도 하고 계셨다.
"영수님,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학생! 걱정 마, 바닷물이 뒤집히는 소리라네"
아침에 일어나 조금 잔잔해진 바닷가를 자세히 살펴보고서는 지난밤에 들러온 괴성의 정체를
조금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파도가 항상 높은 곳이라 연안은 급하고 작은 돌이나 모래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가에 보이는 돌들은 어른 머리통만 하고 모두 둥글둥글했다.
고만 고만한 이런 돌들과 물속에 있는 이보다 더 큰 돌들이 큰 파도에 밀려 서로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였다. 물속에서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라 땅속으로 물속으로 전파되면서 우리들 귀에는
심장을 울리는 괴성으로 들렸던 것이었다.
42km나 되는 섬 전체 연안들이 밤새도록 이런 괴성을 질러대니 이 소리를 처음 접하는 외지인들은
어찌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곳 주민들은 반농반어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육로는 산을 넘거나 바닷가의 가파르고 위험한 오솔길을 걸어 다녀야만 했고 화물을
운반하거나 나들이 나갈 때는 군에서 운영하는 부정기 소형 통통선을 이용하고 있었다.
오징어잡이 배는 전부 무 동력 조그만 돛단배였다.
한 주일이나 수작을 부린 끝에 겨우 오징어 배를 함께 타고 바다에 나갈 수가 있었다.
배를 타기 전에 나더러 아무 바다 풀이나 한 아름 걷어 오라고 하였다.
오후 5시경 출발한 2인승 오징어잡이 배는 섬을 등지고 신나게 바닷속으로 달려 나갔다.
안전을 고려하여 마을 배들이 함께 출항하고 함께 귀항하는 규칙이 있었다.
한 여름 석양에 펼쳐진 돛단배 레이스는 정말 호화 요트 못지않은 멋진 광경이었다.
어둠이 깔려오자 모든 배들이 카바이드 등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바닷속에 희끗희끗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닷속 살아있는 오징어 몸에 있는 인 성분이 내는 인불이었다.
미끼도 없는 낚싯줄을 물속에 집어넣고 감아올리니 팔뚝만 한 오징어가 연속으로 걸려 올라왔다.
오늘은 과외로 한 사람 더 탔기 때문에 내 몸 무게만큼 오징어를 적게 잡고 낚시를 마무리 지었다.
그때야 왜 낚싯배에 외지인을 쉽게 태워 주지 않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갈 때는 돛을 올려 힘 안 들이고 바다로 나갔지만 들어올 때는 바람이 없어 노를 저어 들여와야만 했다.
한참을 노를 저어 오다 조금 쉬는 시간에 가져간 바다풀을 물 위에 이리저리 펼쳐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바다 위에 펼쳐놓은 풀 위에 번쩍번쩍한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히 내려다보니 살아있는 꽁치였다.
뜰 체로 몇 번을 뜨니 금방 몇십 마리가 배속에 들어와 잡아놓은 오징어 위에서 퍼덕이고 있었다.
지금은 꽁치들의 산란철이라 회유하던 꽁치가 이 풀을 보고 산란을 하기 위해 풀 위에 올라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부들은 이때를 알고서는 정말 원시적인 방식으로 그날 먹을 양만큼만 잡고 있었다.
다음은 오징어 한 마리 의 배를 갈라 내장을 조심스레 끄집어내었다.
30여 미터 정도 되는 낚싯줄 끝에는 커다란 납봉이 달렸고 바로 위에 상당히 큰 낚시가 있었는데
여기다가 오징어 내장을 미끼로 단단히 걸어 놓았다.
물속에 던져 놓고서는 있는 힘을 다해 다시 노를 저어 나갔다.
잠시 후 배 머리에 묶어 놓은 낚싯줄에서 턱 턱 하는 소리가 들렀다.
영문도 모르고 지켜보고 있는 나더러 줄을 당겨 보라고 하였다.
맨손으로는 도저히 당길 수가 없을 정도로 줄이 무거웠다.
실 장갑을 얻어 끼고서는 한 찬을 씨름한 후 올려놓고 보니 작은 어린애만 한 대물 방어가 걸려 있었다.
아마도 10kg는 족히 더 나갈듯한데 뱃살과 맛있는 부위 조금만 남기고 그대로 바다에 버려버렸다.
이런 고기가 여름철이 되면 이 바다에 지천으로 몰려온다고 했다.
왜 안 잡느냐고 했더니 잡아봐야 냉동 시설과 운송 수단이 없어 대륙(육지) 시장에 내다 팔 길이
전혀 없다고 했다.
모두 다 자연, 바다와 산에 순응하며 순박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버지요 어머니요 형들이요
누나들이었다.
욕심 없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참 이웃이기도 하였다.
철없던 젊은 시절이라 이것도 모르고 그들의 어리석고 구차한 생활만 탓하고 돌아온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참으로 부끄러워진다.
66년도 아직 도시 물이 덜 들었던 때인데도 불구하고 욕심으로 잡고 팔고 그리고 돈 벌고 출세하고
부자가 되는 것만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있었던 것 같다.
다시 이곳을 찾아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이제라도 뒤늦게 깨달음을 얻게 되어 정말 다행으로
생각한다 아니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다.
2016년 9월 16일
-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