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김 경덕



우리는 추억을 먹고산다.

배고프고 어려웠던 시절 잊고 싶지만 결코 잊히지 않는 그때 그 시절...,

그게 바로 우리들의 "국제시장"이다.

아내와 이 영화를 보고 일어서며 눈물을 훔쳤다.

아내의 한 마디

" 왜 당신은 눈물이 그렇게 해퍼?"

독일 탄광에 파견된 광부 일을 제외하고는 나도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영화에서 빠뜨린 다른 이야기를 더듬고 지나가야겠다.

4월 한 달 매주 양평의 영성공동체인 모새골에 갈 때마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쑥을 한 줌씩 뜯어온다.

이것을 재료로 아내가 끓어 주는 쑥국을 나는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향과 맛을 남몰래 즐기면서 먹는다.


그러나 쑥을 보면 항상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

일명 쑥 개털(?)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허탈한 음식이라 재현조차 할 수도 없다.

6.25가 한창이거나 바로 휴전이 된 전, 후 춘궁기 남녘땅엔 각지에서

피난민들이 몰려와 생명을 어렵사리 부지하고 있었다.

부산을 강 건너에 두고 있는 내 고향 땅에는 생존경쟁이 살벌한 도시에서

밀러 난 시골 출신 피난민들이 제법 많이 흘러 들어와 살고 있었다.

지금이야 봄 철에도 비닐하우스 등 농사일이 많아 일용직까지도 외부에서

데려와야 하지만 당시는 모내기 전까지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먹을 것도 부족하고 할 일도 없는 3,4월 이 시기가 바로 춘궁기이다.

춘궁기에는 매주 한두 번 날을 받아 동네 아낙네들이 때를 지어 거룻배로

강을 건너 지금은 아파트 촌이 된 부산 땅 금곡으로 가서 쑥 사냥을 한다.

경부선 철길 뚝에 자란 쑥들이 건실하고 먹을 양이 많았기 때문이다.

각 가정 형편에 따라 이 쑥으로 각종 요리로 만들어 허기진 배를 달랬다.

토박이고 여유가 있는 집은 쌀가루를 버무려서 쑥 개털을 만들고,

그다음 그래도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집은 밀가루로 버무려 쑥 개털을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집, 바로 피난 온 집은 쑥은 뜯어 왔으나 속에 함께 넣을 것이 없었다.

마을의 정미소를 우리 집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 해질 무릎이면 없는 집 어른들이 정미소에 나타나 마당을 쓸거나

소소한 잡일을 거들어 준다.

청하거나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벼를 도정하려면 보통 7,8번 도정기를 통과시켜야 고은 백미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7분도, 8분도 백미라고 부른다.

보통 5번 정도 도정기를 통과하고 나면 상당히 고운 겨와 쌀눈이 깎기에 나온다.

평상시에는 이걸 따로 모아서 소나 돼지의 사료로 귀하게 사용한다.

그 시절 먹거리가 궁한 이웃은 5분도 도정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7,8분도 도정 시

나오는 겨를 일을 도와준 대가로 받아 간다.

이것으로 쑥과 함께 버무려 솥에서 쪄낸다.

앞의 두 개털보다 이 마지막 개털을 가마솥에서 찔 때 나는 냄새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맛은 별로이지만 구수한 냄새와 향 만은 단연 최고이었다.

이것이 바로 춘궁기에 허기진 이웃 식구들을 먹여 살린 구휼 양식이었다.


그러나 이 음식을 먹은 급우들이 학교에 와서는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바로 악성 변비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존경하는 차 문태 선생님, 나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 이시다. 선생님의 책상 서랍에는 이상한 젓가락 몇 개와 장갑 비슷한 것이

몇 개 들어 있었다.

2 ,3 교시가 끝나고 나면 철도 없는 우리들은

'선생님'

' XX 똥꼬가 막혔데요'

선생님은 쉬는 시간 이 친구들을 다리고 뒷산으로 올라가신다.

개털을 연속으로 먹은 급우들을 관장시키기 위해 뒷산으로 다리고

올라가 신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기막히고 슬펐던 현실이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의 어린 시절 삶이었다.

그 옛날을 회상하니 지금에서야 비로소 눈물이 솟아진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

'그리고 존경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들 이렇게 열심히 공부도 하였고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2015, 4, 28

작가의 이전글4.19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