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그림 그리다가 자주 슬럼프에 빠진다
작업실에서 가끔 쭈그리고 앉아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거 지금.. 내가 잘하고 있나? 남들 다 그리는 그림 그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투자하는 시간이 나중에 다시 보면 다 쓸데없는 거 아닌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 설치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본인처럼 한 번씩 느끼는 고민일 거라 생각한다. 사실, 뭔가 처음 그리려면 도대체 뭘 그려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처음 하얀 캔버스에 뭘 그릴지 스케치하는 게 가장 어려운 것이다. 즉 콘셉트이라는 것, 그것을 잡는 일이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종이에 이것저것 끄적이다가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려보고, 필요한 사진을 출력해 캔버스에 담아보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진행하기가 어려운 순간이 온다. 난 그때서야 깨달았다. 이거… 나 슬럼프 빠졌나?
그럼 난 왜 슬럼프에 빠지는가?
첫째, 한 곳에 시간을 너무 쏟을 때 주로 생기는 것 같다. 요즘도 가끔 느끼는 것이지만 종종 내가 슬럼프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고등학교 미대 입시 준비할 때 그랬었다. 3절 사이즈 하얀 도화지에 정물 수채화를 그릴 때, 사물의 위치를 잡고 스케치를 잡는 것 까지는 괜찮았다. 붓에 물을 적셔서 채색만 들어가면 자신이 없었다. 처음 채색을 초벌이라고 하는데, 초벌을 하고 묘사 들어가는 과정에서 대충 끝내버리고 싶었다. 재미가 없었다. 다시 말해.. 지겹기 시작했다. 이걸 왜 맨날 반복적으로 생각 없이 칠하고 있는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것인지 힘들었다. 요즘도 가끔 그런 기분이 든다. 뭔가 진행할 때 계속적으로 하나에만 시간을 쓸 때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에 집중하다가 불현듯 다른 생각에 머리를 스칠 때.. 기존 해왔던 것들이 물거품이 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하던 것 멈추고 그냥 앉아서 그대로 삼십 분 멍 때리게 된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말이다.
둘째, 너무 잘하려고 해서 그렇다. 뭐든 일이 잘 마무리되어야 직성이 풀릴 때가 있다. 그림이던 일이던 끝내야 하는 일과 작업들은 산더미 같은데 뭔가 손에 잡으면 매번 부족하다. 글을 쓸 때도 타당성 있게 논리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전달했는지 검토하게 된다. 이메일을 쓸 때, 메모장에 써두고 계속 수정하고 읽어보고 탈고하고 여러 번 하다가 다른 일이 겹치게 된다. 그러면 이메일 쓰길 멈추고 다른 것을 하게 된다. 캔버스 틀을 다 짜두고 작품에 대어 보다가 사이즈를 줄여야 할 것 같으면 다시 뜯고 처음부 더 다시 하게 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어느 것 하나 완성되지 않았는데 벌려놓은 게 산떠미 같기만 하다. 모든 것이 부담으로 느껴지게 되고 진행이 더딤을 느끼게 된다. 사실 적당히 해서 끝내도 되는데 말이다. 약간 편하게 생각하면 마무리도 빠르다.
셋째, 새로운 생각이 났을 때 주로 그렇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 곳에 주로 시간을 무척 썼을 때 불현듯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 또한 생각 없이 집어 들은 책을 통해서 나오기도 하고 아이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가끔 남편과 혹은 주변 이웃들과의 대화에서 나온다. 길 가다가 주변 사물을 통해 나오기도 하고, 인터넷 서핑하다가 나오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다시 본래 작업실로 돌아와 붓을 들면, 시작을 할 수 없게 된다. 아.. 또 시작이구나. 슬럼프..
새로운 생각은 기분 좋은 일일 수도 있고, 기존 작업에 방해가 되는 요인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방향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존 작업을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긍정적인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괜히 새로운 생각으로 인해 기존 작업을 다시 망가뜨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면? 그것은 과연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 새로움으로 인해 긍정적이고 동시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슬럼프에 빠지는 것 같다.
넷째, 몸이 안 좋아지면 그렇다. 갑자기 어제부터 목이 따끔거려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재채기가 심해지고 온몸이 쑤시는 거였다. 그러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몸의 무거움이 있다. 그 말은,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 뭐든 만사가 귀찮고 다 덮어버리고 싶어 진다. 가족 중에 누군가 아파서 간호해야 하는 상황 또한 마찬가지이다. 단순 감기여도 아이나 남편이 아프면 정말 모든 일이 중단이다. 특히 해외에서 아프면 더 서럽다. 동네 내과 가는 일도 미리 예약해야 하고 병원 지료비는 어찌나 비싼지.. 약값도 만만치 않다. 시간도 정말 많이 써야 한다. 한국처럼 내과나 치과 또는 소아과 바로 옆에 약국이 있는 곳은 정말 눈 씻고 찾을 수가 없다. 이렇게 평상시 물 많이 마시고 아프지 않게 잘 보살펴야 한다. 아프면 며칠간 작업이 중단되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감이 안 오게 되고 능동적인 사고 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다섯째, 괜히 휴대폰에 시간을 쓰다가 슬럼프에 빠진다. 이건 정말 개인적인 경험이다. 전시 일정이 촉박하지 않고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딴짓을 많이 하게 된다. 전시 D- Day라 해도 일주일 전이지 평상시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괜히 여유를 부리게 되고 딴 길로 새는 걸 느낀다. 휴대폰 만지작 거리다 보면 옛 친구들 프로필 사진 찾아보게 되고 말 걸고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검색하게 되고, 사진 감상하다가 인터넷 검색과 인터넷 쇼핑하게 된다. 또한 생각나는 영화 검색에 유튜브 틀어서 영화 소개 기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 다시 붓을 잡으려 하면 잘 안된다. 난 왜 그럴까? 뭐가 문제일까? 이렇게 후회하다가 또 휴대폰을 만진다. 아무래도 슬럼프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을 갖게 된다. 휴대폰 만지다가 시간 다 가게 되면 일이 하기 싫어지고 이내 무력감에 스트레스를 더 받게 되는 것 같다. 휴대폰을 만지며 보낸 세월이 정말 얼마인지,, 내 삶에 깊숙이 자리 앉아 내 기분까지 왔다 갔다 하게 하곤 한다. 옛날에는 아날로그 전화기로 통화만 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이 휴대폰이 뭐든 것을 대신해주니 언젠간 내가 하는 예술까지 대신해 줄 때가 올까? 결국 하고 있는 작업은 몸을 써서 해야만 일이 끝나는 게 대부분인데 말이다.
슬럼프는 나 자신을 너무 힘들게(?)할 때 생기는 것 같다. 열심히 집중할 때 생각이 많고 복잡하고 한 가지에만 집착하듯 시간을 쏟아부었다. 새로운 생각에 의심을 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 몸도 약해진다. 휴대폰만 보게 되고 곧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나를 너무 재촉하지 말자. 가끔은 적당히 해보자. 조금 간단하게 쉬었다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