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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Mar 23. 2020

너의 결혼 소식을 전할게

이번 봄에 꼭 만나


내 방에서 요즘 박스들이 줄지어 나가고 있다. 책장은 숭숭 비고 서랍 속 잡동사니들은 덜어져 간다. 마치 어딘가로 떠날 사람처럼 방에 있는 물건들을 바깥으로 덜어내고 있다. 그렇다. 나는 봄의 문턱에서 내방의 케케묵은 것들을 상쾌하게 버려볼 결심을 했다.


옛 물건들을 가끔씩 꺼내어 볼 때면 그 당시 관심이 많았던 것이 무엇인지, 그때 나의 생각은 어디에 쏠려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지금은 마음이 다 사그라졌지만 추억의 매개체는 그 시간으로 나를 걷게 한다. 머물고 싶은 기억의 순간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나의 나이가 점점 많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물건들도 점점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기에 내 방에 하나씩 늘어난 수납장도 책장도 더 이상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그러다 보니 책상 서랍 속은 터지기 일보직전이고 이제는 책을 그냥 쌓아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내방의 추억들은 넘실넘실 대다가 범람한지 오래다.    

  

새해가 되고 겨울의 끄트머리의 어느 날. 책장에 있는 책들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내 방에 거주한 책들의 연차가 눈에 보였다. 그리고 더 이상 꺼내보지 않는 책들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렇게 책부터 시작했다. 중고서점에 보낼 책과 버릴 책을 분류하여 착착 박스에 넣고 남은 책들은 책장에 재배치했다. 카테고리별로 분류되어 있는 책들을 보니 웬걸. 기분이 너무 좋아진다. 기분이 아주 산뜻해졌다. ‘그럼 다음은 추억의 물건들을 정리해볼까’ 하며 서랍을 열었다. 아련한 시절의 편지와 카드, 일상이 세세하게 적힌 다이어리, 푹 빠져있었던 마라톤 대회 배번호, 오래된 영화표들을 보면 함께 했던 사람들이 기억나기도 하고 기억이 나지 않기도 한다. 15년이 넘은 춘천 가는 기차표를 보면 3월에 간 건 기억이 나는데 6월에 간 것은 왜 갔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봐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들. 보아도 감흥이 없는 것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다 보니 긴 시간 잠들어 있던 추억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그때의 기억에서 머물고 서성이기를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풀이되는 망각과 기억의 소생에서 이제 그만. 까마득한 날의 시간의 흔적인 그 물건들의 기억에서 그만 질척거리기. 이제 작별인사를 고한다. 안녕.’ 헤어지지만 사랑이 남은 자의 그것처럼 무심한 작별인사로 마음을 정리한다. 그리고 버리기를 시작했다. 서랍을 열고 수납장을 열어서 다 끄집어낸다. 이제는 소중하지 않은 그때의 그것들이 되어버린 것이 살짝 슬프기도 했지만 처음에야 어렵지 버리다 보니 더 버리고 싶어 졌다. 물건들을 자꾸 덜어내고 일주일 넘게 버리다 보니 떠나보내는 것이 덤덤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내 방도 내 마음도 미니멀리즘. 나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과의 회자정리는 그렇게 진행되어 갔다.    

  

그런데 버리고 버리다가 다시 모아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인들의 청첩장이다. 청첩장들도 자칫 폐지함으로 바로 직행될 뻔했지만 찬찬히 하나씩 들여다보니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그건 바로 청첩장을 다시 주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각자의 바쁜 일상에서 뜬금없이 아주 기쁘게? 만날 수 있는 일은 나의 결혼 소식을 전하는 것일 텐데. (나도 금세 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이번 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이제 나는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이 되면 지인들에게 청첩장을 건넬 것이다. 그리고 청첩장을 나에게 주었던 그때로 돌아가서 흘러간 우리의 지난 시간을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고 싶다. 서로 다른 선택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떤 곳으로 걷게 만들었는지. 서로의 다른 일상 안에서 지금의 계절과 그때의 계절은 무엇이 다른지 궁금하다. 각자의 삶의 무게감이 어떻게 다른 지도. 많은 계절이 지나고 우리는 어느덧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이 잊혀지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도 결국 소중한 기억은 남고 사람도 남는다. 그래서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소중한 벗에게 연락할 것이다. “이번 봄에 꼭 만나. 나는 너에게 줄 청첩장을 가지고 갈게.”      





2월 중순 즈음에 이 글을 완성했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로 세상이 이리될 줄 몰랐다. 설마 했던 때였다. 그런데 이런 세상을 마주하고 보니 한 치 앞도 못 보는 인생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3월인데 계절은 아직도 긴 겨울인 것만 같다. 언제 이것은 끝이 날까. 4월의 봄에는 이번 봄에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을까. 모두가 마스크를 벗는 봄은 올까. 그런 봄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2020년의 봄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브런치를 시작한 봄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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