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브루잉의 세계로.
드립커피를 처음 먹어본 것은 2009년 가을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골목마다 카페가 있던 문화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드립커피를 파는 곳은 드물었다. 드립커피에 관심을 가졌었던 그 가을, 강릉에서 1회 커피축제가 열렸다. 옳다구나 하고 가서 이른 낮부터 늦은 밤까지 드립커피를 마셨다. 그때는 원두에 대해 제대로 몰랐다. 드립커피를 몇 번 먹어본 경험으로 케냐는 신 맛, 코스타리카는 꽃향. 과테말라는 다크한 맛. 이렇게 그냥 단편적인 맛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커피에 대해 더 알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단편적인 지식인지 깨닫게 되었다. 커피에 다채로운 향미가 있다는 걸 점점 더 알아가고 있다. 지금도 가끔씩 "케냐는 시죠?"라고 질문하는 분한테 더 다양한 원두의 맛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케냐원두는 시다’라고만 생각하던 시절 케냐원두는 케냐AA만 있다고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 AA가 원두의 스크린 사이즈(생두 크기) 등급인 줄도 몰랐다. 그랬던 내가 카페를 운영하다니 사람일은 모르는 거다. 케냐에도 다양한 원두가 있다. 카페를 오픈한 후 카페에서 사용했던 케냐 원두만 해도 다양하다. 케냐 루키라 골드 AA, 케냐 친가 퀸 AA, 케냐 아이멘티 AA TOP, 케냐 오타야 AA TOP 등인데 이 원두들의 플레이버 노트만 보아도 다채로운 향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케냐를 단지 ‘시다’라고 단편적으로 표현하기는 아쉽다. 내가 사용했던 케냐원두의 Aroma/Flavor 노트를 보자. 가공방식은 모두 washed이다.
케냐 오타야 루키라 골드 AA
Brown sugar, Burnt sugar, Nut,
Black tea, Dry Dates, Honey
케냐 친가 퀸 AA
Sweet apricot, Fruity,
Nutty, Chocolate
케냐 아이멘티 AA TOP
Grapefruit, Pineapple,
Lemon, Chocolate
케냐 오타야 AA TOP
Black tea, Citrus,
Apricot, Dark chocolate
원두는 마치 와인처럼 참 다양한 맛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원두의 다채로운 맛을 잘 구현해 주는 것이 드립커피다. 드립커피란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핸드드립 커피다. 브루잉 커피라고도 한다. 필터를 끼운 드립퍼에 적정하게 분쇄된 원두가루를 담고 드립포트를 이용해 적정한 온도의 물을 손기술로 부어주는 것이다. 바리스타의 역량에 따라 맛의 차이가 큰 추출도구다. 역량에 따라 맛의 차이가 있다는 건 으쓱해지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드립 추출도구에는 칼리타, 멜리타, 하리오 V60, 고노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추출도구마다 추출구로 빠져나가는 물 빠짐 속도가 다르다. 똑같은 원두라도 드립퍼에 따라 다른 뉘앙스의 맛을 낼 수 있다. 나는 하리오 V60을 쓴다. 하리오는 칼리타나 멜리타보다 물 빠짐이 빠르다. 원두의 깔끔한 맛과 풍부한 향미를 잘 표현해낼 수 있다.
브루잉 과정을 배울 때 똑같은 분쇄도의 커피 가루를 담고, 똑같은 온도의 물을 사용하여, 똑같은 추출도구로 내렸지만 맛은 다 달랐다. 선생님이 내렸던 커피가 가장 맛있었다. 드립추출이 내리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변수가 많다 보니 똑같은 원두로 내려도 내리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르다. 똑같아 보여도 커피를 내리는 기술에는 내리는 사람만의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바로 ‘손맛’이다. 초보에게는 이 손맛이 너무 어려웠다. 물줄기의 굵기, 속도, 낙차 모든 것을 몸에 체득해서 내려야 했다. 이론은 알지만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선생님과 똑같은 손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저 그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하면 되는 것인데 그게 쉽게 되지 않는다.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직 연습뿐이다. 어느 정도 능숙해지면 자신만의 방법으로 연구하여 맛있게 내리는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면 된다. 기본 추출방법에서 나만의 창의성이 더해진 나만의 드립커피가 되는 것이다.
TV 프로그램에서 추출도구를 변형시켜 새로 고안해낸 도구로 지연드립을 하는 바리스타를 보았다. 드립커피를 진하게 내려서 물을 섞는 방식이다. 나도 일정한 양을 추출하여 뜨거운 물을 섞는 방식을 사용하는데(아이스는 다른 방식이다), 그 바리스타는 시간을 더 들여 아주 진하게 내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처음 보는 색다른 방식이었다. 커피는 이렇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잘 내리면 된다. 정답은 없다. 기본에 자신만의 방식을 더해서 맛있는 커피를 만들면 된다.
브루잉 커피에는 다양한 추출도구가 있다. 다양한 원두와 다양한 커피 추출도구를 사용하여 다채로운 커피의 신세계로 손님들을 모시는 것. 그것이 나의 할 일이다. 그렇지만 현재는 에스프레소를 기반 한 커피음료가 대세다. 브루잉 도구들로 추출하는 커피들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재빠르게 내리는 식후 땡 커피보다는 여유로운 시간에 즐기는 느린 커피로 생각되곤 한다. 나도 드립커피를 주문하는 분들에게 “드립은 시간이 좀 걸립니다.”라고 덧붙여 말한다. 느림의 미학이 있는 커피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기다릴 시간이 부족한 손님에게 다채로운 원두의 맛을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가장 좋은 등급의 스페셜티를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빠르게 추출하는 아메리카노는 어떨까? 원두의 신세계를 에스프레소 머신을 통해 맛보게 하는 것이다.
전에 스페셜티 원두로 추출한 에스프레소로 만든 아메리카노를 마셔본 적이 있다. 그때의 원두는 코케허니였다. 스페셜티를 9기압 머신으로 내려 먹는다는 것은 드립커피로 느낄 수 있는 향미를 구현해 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정말 환상의 맛이었다. 꽃향기를 머금은 ‘강렬한 아메리카노’ 였다.
에스프레소는 빠르고 강렬하다. 브루잉은 느리고 부드럽다. 빠름과 느림의 커피가 공존하고 그것을 다 경험할 수 있는 카페를 만들고 싶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다양한 원두와 다양한 추출도구를 함께 경험하는 그런 카페를 만들고 싶다. 사람의 입맛도 다양하고 추출도구도 다양하다. 자신의 취향과 입맛에 맞는 추출도구를 찾아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일을 크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건 그것을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