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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Jul 29. 2020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란.

내일 아침 죽는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



7월의 여름이 시작되고, 비가 주룩주룩 하루 종일 내리던 날이었다. 택배를 보낼 일이 있어서 운동화에서 슬리퍼로 갈아 신고 양말도 벗고 우체국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바람이 부니 비가 사선으로 내렸다. 들고 있던 종이가방이 젖는 것 같아 성큼성큼 더 빠르게 걸었다. 그러다 어떤 미끄러운 바닥을 밟고 크게 휘청댔고, 비틀거리며 두 발자국 더 나아가다 결국 앞으로 철퍼덕 엎어졌다. 흥건하게 젖은 길바닥에 몸이 붙는 순간, 튕겨지듯 벌떡 일어났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있는 버스정류장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바로 앞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본 아주머니는 놀란 얼굴로 “괜찮아요? 큰일 날 뻔했어요!!” 하며 소리쳤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괜찮습니다. 미끄러졌네요.” 하며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르게 벗어났다. 놀래서 심장은 팔딱이는데 킥킥 웃음이 나왔다.



     

자정 즈음, 그날의 할 일을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려고 누웠는데, 스멀스멀 이상한 기분이 나를 에워쌌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묘한 기분인데... 낮에 넘어진 것이 잘못돼서 자다가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깊은 밤 느닷없이 찾아온 불안감은 점점 커지고 두려움과 섞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도 ‘내가 내일 죽어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아주 가끔씩 상상으로만 했던 것이 현실화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니.


지금 내가! 왜! 갑자기?? 잠은 안 오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불안감에 휩싸이며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럼 자다가 죽으면 지금 뭘 해야 하지? 자기 전까지 붙들고 있던 노트북이 생각난다. 그럼 일단 일기와 기도문을 다 삭제해야겠다. 손으로 썼던 옛날 일기장도 다 버려야 하는데... 기록하는 건 좋아하지만 날것의 기록들이 누군가에게 읽히는 건 좀 부끄럽다. 나의 내면의 민낯. 지난 여러 상황 속에서의 나의 자아. 지나고 나니 별거 아닌 일들...

      

방안을 쓰윽 둘러보니 일기장 말고도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럼 먼저 가족과 친구에게 편지를 쓰자.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도 초기화하자. 방 정리 후에 마지막 샤워를 하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자. 그리고 기도하며 죽음을 기다리면 평안할 거야...... 하면서 생각이 많아지니 잠이 쏟아진다. ‘저 오늘 데려가지 마세요...’ 하며 어느새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나는 눈을 번쩍 뜨고 멀쩡하게 일어났다. 내 호흡은 끊기지 않았고, 나에게 아직 삶이 남아있었다.


    




평소 에세이를 자주 읽던 나는 최근 두 달간 소설을 주로 읽었는데 삶에 관한 것인 에세이와는 달리, 선택한 소설마다 죽음이 연달아 나왔다. 10번이 넘는 죽음을 보았다. 갑작스럽게 인물들에게 닥치는 죽음을 자꾸 보니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불편해졌다. 이것이 짧은기간 무의식 중에 계속 쌓이다 보니, 넘어진 밤에 그런 기분이 갑자기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와 같이 잘 지내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는 가끔씩 불안하다. 이러다 내가 내일 죽을 수도 있다. 살다가 죽는 것은 순서도 없고 가는 날도 모르니까. 

         

그럼 나의 삶의 끝은 언제인가. 기한을 모르는 유한한 인생 안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왕 나의 죽음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앞으로의 삶이 이제 딱 100일 남았다고 가정해본다.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가능한 미루지 않을 거고 시도하게 될 것이다. 신기하게도 저 멀리 안 보이는 나의 미래에 대한 염려가 완전히 사라진다. 내가 어디로 흘러 가는지 몰랐는데 이젠 아니까. 그러니 내가 정말 행복해지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다. 거창한 무언가 보다는 매일을 정성스럽게 살고 싶은 거다. 그리고 100일 동안 변화되는 심경을 매일 써야지.


나의 마음을 괴롭히거나 불편하게 하는 집착은 사라진다. 안 좋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의 초연함이 생긴다.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는 것은 곧 죽는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곧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너도 곧 죽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네가 곧 죽을 건데, 소모적인 옳고 그름의 규정이 무슨 소용인가.' 그저 내가 더 겸손해지게 된다. '죽기 전에 잘해줄게.' 하며 포용하는 마음이 커진다.


모순적이게도 죽음을 생각하니 앞으로 살날을 생각한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유쾌하거나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죽음을 인정하니 나의 삶과 주변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더불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 세상에 그리고 주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가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남은 삶을 이왕이면 의미 있게 살다 가고 싶다.


신기하다. 결국 죽을 건데, '곧' 죽을 거라 생각하니 생각이 달라진다.





      

지금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 하면서도 바로 죽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죽는 줄 알았다가 눈을 번쩍 뜨고 살게 되었으니 삶에 새로운 에너지가 생긴다. 사실, 이 침체된 시기에 무기력이 슬슬 더해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을 즐겁게 살아야겠다. 아마도 살날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지금, 나는 많은 것이 가능하고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당장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내방을 정리하는 것이다. 연초에 방에 있는 물건들을 많이 덜어냈는데 이제는 더 가벼운 마음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생각하니 미니멀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미루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그때가 가장 좋은 때니까.





      

지난번 넘어졌을 때 접질린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아직도 살짝 뻐근하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나를 에워싼 그날의 기분. 그 밤 이후 삶이 더 소중해졌다. 손이 나을 때쯤이면 여름은 지나가겠지만 이번 여름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내 호흡이 끊길 때가 인생에서 가장 성숙해져 있을 때이길 바란다.









살아있으니 비가 그친 눈부신 파란 하늘도 볼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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