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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Mar 31. 2021

당신의 새벽은 무엇인가요?

지금 밤을 통과하고 있나요?


      

오랜만에 한 친구와 만나 식사를 하다가 진지하게 질문 하나를 해본다.       


“너의 새벽은 뭐야?”       


초밥을 오물오물 먹던 친구는 뜬금없이 던지는 질문에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해본다.       


“음.. 그러니까 새벽은... 어떤 꿈일 수도 있겠고, 간절히 바라는 욕망이 실현되는 시점일 수도 있겠고...”     

          

나의 부연설명을 듣더니 그제야 살짝 웃으며 대답을 한다.          


“언니가 이런 얘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                            







“밤을 통과하지 않고는 새벽에 이를 수 없다.”     

                                                

                                         - 칼릴 지브란 -       




한 시인의 문장을 보고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다. 이것은 이미 알고 있는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와

비슷한 느낌의 문장인데, 뭐랄까... 어딘가를 향해서 가고, 또 가다 보면 마침내 새벽이라는 곳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마음 깊이 다가온다.


흔히 이야기하는 새벽은 자정을 지난밤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부터 말하는 새벽은 '동이 터오는 시점’으로 이야기해본다.





                              

‘나의 새벽’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지금 나의 새벽은 무엇인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 내 삶에서 간절히 원하는 새벽이 있나? 누구나 지금 원하는 코로나의 종식만 떠오르고 다른 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 최근에 간절하게 원했던 새벽이 나에게 있었나? 있었다. 아주 간절하게 원했던 새벽.      


그 새벽은 ‘출간’이었다. 그때 썼던, 밤을 통과하고 있는 일기를 옮겨본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그렇지만 기대가 된다. 내 원고가 출판사에서 진지하게 검토 중이라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행복한 상상이다. 그렇지만 실패로 돌아올 경우에는? 그럼 다시 투고하면 된다. 계속 투고하면 된다.           

투고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나. 적어도 100개는 투고하여야 하지 않나. 그래야 하지 않나. 그러면 그 후에는? 그때는 내가 출판사를 만나 있을까? 내가 이렇게 투고하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면. 그러면 결국 출간에 맞닿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글을 쓰고 퇴고하는 작업도 기나긴 밤이었지만 퇴고를 끝낸 후 이어진 투고의 밤은 낙심과 절망의 밤이었다. 기대감으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 출판사 발신의 메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마음을 점점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나의 온 힘을 끌어다 쓴 글이 출간되지 못하고 방치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거절 메일을 받을 때마다 몰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투고했던 출판사의 홈페이지에서 원고가 반려되었음을 확인하고 ‘이제 그만해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닿아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마음은 덤덤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단념한 듯한 밤을 보내고 다음날이 되었다. 또 다른 출판사에서 메일이 왔다. 그래서 아무 기대 없이 메일을 열었는데. 세상에. 출간 제안 메일이 왔다. 참 신기하지. 인생이란.        


출간의 시점을 복기해보니 내가 어떤 새벽을 간절히 원하기라도 해야 새벽이 올 텐데. 언젠가부터 외부의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로운 문을 열게 되면 결국 만나게 되는, 긴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고통의 밤이 내키지 않는 것도 있겠다. 새벽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은 마음을 매우 답답하게 만들 수 있으니, 새벽을 바라지 않고, 또한 현재를 막막한 밤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환한 낮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일상이 기적이니까. 새로운 시도는 없지만 고통과 절망도 없는 것이 편안하다고 하면서. 일상의 평범함속에서 그저 잔잔하게 흘러가듯 사는 거.      


그런데 흘러가듯 살면서 '이만하면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이 나의 늘어가는 게으름을 가린 핑계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경계가 필요하다. 요즘의 나는.      




놀랍고도 기쁜 새벽을 맞이하고 낮을 걷다 보면 그 낮이 익숙해진다. 출간을 한 것도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인생이란 새벽을 맞이하는 그 순간의 기쁨을 느끼고 살다가 또 다른 새벽을 찾아 나서는 것을 반복해야 하는 것인데 언젠가부터 만족인지, 체념인지, 초연한 건지, 방관인지 모를 듯한 마음이 섞이고,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진다.  

      

꿈이란 것도 점점 모호해진다. 어렸을 때는 하고 싶은 직업이 꿈과 연결되었다면 ‘지금 나의 꿈은 뭐지.’ 하며 곰곰이 생각해보는데 그게 딱히 모르겠다. 새벽이든, 꿈이든 무언가 바라야 하는데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건 중년의 무기력인가. (타당한 핑곗거리가 없는 중년 새내기입니다.)     


그러니 무기력과 게으름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거창한 새벽을 생각하기보다 어떤 사소한 욕망일지라도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일상 안에서 작은 목표를 세워보는 것이다. 가령 정체된 시간이었던 '플랭크'를 30초씩 늘려가거나, 책을 뜸 들이지 말고 계획한 시간대로 완독 하는 거? 한동안 방치했던 바이올린을 다시 잡고 어떤 악보를 연주해보는 거? 내가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는 사소한 욕망들 말이다. 그렇게 사소한 욕망을 하나씩 이루다 보면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무언가 시도하는 것이 밤을 통과하는 시간 안에서 나에게 괴로움을 줄 수는 있어도, 앞으로의 삶의 여정 중에 새벽을 만나는 일이 자주 있다면, 한참 더 멀리 내 인생을 걸어간 후에 아쉬움보다는 추억이 많지 않을까. 내가 겪었던 수많은 밤들. 지나고 나면 그 밤은 결국 의미 있는 고통이었지 않는가. 또한 긴긴밤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조금씩 나아질 때 생기는 성취감은 힘듬을 상쇄시킬 수도 있고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편안한 것보다, 낙심과 절망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반전도 느껴봐야 삶의 기쁨이 극대화되지.


그러니 주저하지 말아야겠다. ‘결국 해피엔딩일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아마도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파도를 타는 것을 더 조심하고 몸을 사리긴 하겠지만 말이다. 사실 이렇게 시도하고 나아가는 것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나이를 먹어가며 귀찮음과 우유부단함이 늘어가는 양가감정 가득한 나를 계속해서 고무시키고 싶어서이다.

            

새벽을 원해야 새벽이 온다. 타이밍이 아주 절묘한 기가 막힌 우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서는 만나지 못하니까. 그리고 어둠이 더해지고 더해진 짙어진 밤이라도 흔들리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흔들리지 않고 잘 버티면서 새벽을 원하기. 알지 못했던 세계가 확장되는 일은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심경에 따라 낮인지 밤인지 나도 헷갈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은 무엇일까. 올해 봄은 새벽을 정해야겠다. 사소한 것부터 거창한 새벽까지.

             

문득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인생의 새벽에 대해서 이야기 나눈다면 굉장히 낭만적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반짝이는 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질문해야지.


"너의 새벽은 뭐야?"


     





     




긴긴밤일수록 아침은 더 찬란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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