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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Apr 15. 2018

무가지는 무료지만 엄선된 정보는 유료다

도쿄의 ‘온리 프리 페이퍼(ONLY FREE PAPER)’

부동산 임대료가 비싼 도쿄에서는 자투리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아이디어들을 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코인 주차장 위의 허공에 공중점포를 만들어 상가로 분양하기도 하고, 주유소의 유휴 공간을 활용해 렌터카 1~2대를 배치해 놓고 렌터카 사업을 하기도 합니다. 가장 익숙하면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례는 고가 도로 밑 공간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도쿄에서는 고가 도로 밑에 밥집, 술집, 카페 등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쿄 도심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히가시코가네이시역 근처 고가 도로 아래에도 11개 상점으로 이루어진 ‘히가코 플레이스’가 있습니다. 카페, 가죽공방 등 사이에서 매장 중앙의 매대 위에 놓여진 다양한 종류의 얇은 책자들로 눈길을 끄는 매장이 있습니다. 바로 ‘온리 프리 페이퍼(ONLY FREE PAPER)’입니다. 온리 프리 페이퍼는 일본 전역에서 모은 무가지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곳입니다. 길거리나 상업 시설에서 무료로 배포되는 책자인 무가지는 무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와 상황에서 접하게 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외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온리 프리 페이퍼는 무가지의 가격이 아닌 가치에 집중하는 역발상으로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어 냅니다.


온리 프리 페이퍼 매장 내 매대 ⓒ트래블코드


무가지는 가격이 없을 뿐,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온리 프리 페이퍼의 창립자는 양질의 무가지들이 무료로 얻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온리 프리 페이퍼는 일본 전역에서 큐레이션한 무가지를 한 데 모아 전시합니다. 그러자 외면 받던 무가지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매장에 들어와서 서점에서 책을 고르듯 무가지 정보지들을 보고, 마음에 들면 가져갔습니다. 무가지를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달성한 셈입니다.

 

온리 프리 페이퍼는 한 달에 약 100가지의 무가지를 취급합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모든 무가지들을 선보일 수 없기에 온라인 웹사이트에서 취급하는 모든 무가지에 대한 사진과 설명을 제공합니다. 온리 프리 페이퍼에서 큐레이션한 무가지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유료 잡지에 맞먹는 품질을 갖고 있습니다. 디자인 감각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내용도 유용한 정보를 다룹니다. 예를 들어 지역 정보지에서는 시중 가이드북에서 얻을 수 없는 최신의 현지 정보를 담아 내기도 하고, 대학 병원 홍보 잡지에서는 산부인과 전문의가 출산과 관련된 위험이나 대처법 등을 알려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무가지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어떻게 유의미한 수익을 남길 수 있을까요? 온리 프리 페이퍼의 매장에는 무가지에 담긴 정보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렇다 보니, 무가지 제작자들이 돈을 내고 매장의 매대를 사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에는 무가지를 배포하기 위한 인력을 고용하거나 관련 상점에 비치해 두는 것이 보통인데,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온리 프리 페이퍼의 매대를 확보하여 관심도가 높은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온리 프리 페이퍼는 도쿄의 외곽에 위치한 매장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더 많은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큐레이션한 무가지들을 한데 모아 유료로 배송하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이 반영하지 못하는 최신 정보를 다루고, 대중매체보다 뚜렷한 취향과 관점이 담긴 정보를 다루고, 온라인매체보다 정제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구독 상품은 2가지로, 특정 분야나 책자를 지정하여 20개 무가지를 받아 보는 상품과 온리 프리 페이퍼가 취급하는 100여개의 무가지를 전부 받아 보는 상품입니다. 구독료는 각각 3,240엔, 5,400엔으로 관심 분야의 최신 정보를 받아 보고 싶거나 콘텐츠 소비량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깝지 않은 수준입니다.


“큐레이션의 정의는 정보를 수집하고 선별하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수집되기 전에는 광대한 노이즈의 바다에 표류하고 있던 단편적인 정보들이 큐레이터에 의해 끌어 올려져 의미를 부여 받고 새로운 가치로 빛나기 시작한다.”


<큐레이션의 시대>의 저자 사사키 도시나오의 말입니다. 온리 프리 페이퍼는 무가지계의 큐레이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격이 없는 무가지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역발상으로 출발하여 양질의 무가지를 선별하는 큐레이션을 더합니다. 역발상이 안목과 만나 기존에 없던 비즈니스가 탄생했습니다.



본 칼럼은 경제 전문 미디어 <이코노믹 리뷰>의 전문가 칼럼에 연재하고 있는 <최경희의 밑줄 긋는 여행>의 6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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