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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Apr 15. 2018

영화가 만드는 칵테일의 재구성

도쿄의 '8월의 고래(Whales of August)'

기본과 변주. 도쿄 시부야의 한 골목길에 위치한 '8월의 고래'에는 이 두 가지가 다 있습니다. 8월의 고래는 영화 마니아인 점장이 있는 술집입니다. 점장이 영화를 일주일에 10편, 많을 때는 20편이나 볼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소화한 영화가 2만편이 넘는다고 하니, 웬만한 영화는 다 본 셈입니다. 가게로 이어지는 계단에서부터 국적,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영화 포스터들이 손님을 반깁니다. 영화 마니아라면 입구에서부터 황홀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8월의 고래는 단순히 영화광이 운영하는 술집 이상입니다. 방문하는 고객들의 영감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건 덤입니다. 그래서인지 지하1층에 위치한 작은 바임에도 불구하고, 늘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8월의 고래는 술과 영화를 소재로 어떤 기본과 변주를 구현해 냈을까요?


8월의 고래 입구 ⓒ트래블코드


8월의 고래는 바의 기본인 술 종류만 600여 가지를 갖추고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작은 규모의 바들이 200종 정도의 술을 구비해 놓는 것에 비해 월등히 많습니다. 충실한 기본으로 선택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이 8월의 고래가 가진 탄탄한 기반입니다. 가게에 늘어선 수많은 진, 보드카, 럼, 위스키, 브랜디, 와인 등의 화려함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습니다. 주요 메뉴는 칵테일인데, 메뉴판에 적혀 있는 것만 120여종입니다. 각 칵테일들은 진, 보드카, 럼, 위스키, 브랜디, 데킬라, 와인 등 중에 어떤 술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인지, 쇼트, 롱, 프로즌 등 어떤 타입의 칵테일인지도 함께 적혀 있어 고객들의 선택을 돕습니다. 추운 날 마시기에 좋은 '뜨거운 칵테일' 메뉴도 갖추고 있으며, 메뉴에 없는 칵테일도 주문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취향의 애주가들도 만족할 만한 선택의 넓이입니다.


방대한 기본기도 남다르지만, 8월의 고래가 주목 받는 진짜 이유는 변주에 있습니다. 메뉴판을 자세히 보면 칵테일 이름이 남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뉴판에 적혀 있는 120여 가지 이름은 칵테일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 제목이기도 합니다. 칵테일의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정한 것은 단순히 영화 마니아인 점장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 아닙니다. 8월의 고래는 영화를 주제로 한 칵테일을 판매하는 곳입니다. 베이스가 되는 주류, 재료, 컬러 등 칵테일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해당 영화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해 냅니다. 예를 들어 '타이타닉' 칵테일을 주문하면 바다 위의 빙산을 형상화해 큰 얼음을 띄운 칵테일이 나옵니다. 남주인공 잭의 고향이 아일랜드인 점에 착안하여 아일랜드의 브랜디를 베이스로 하고, 푸른색의 컬러로 여주인공 로즈의 다이아몬드를 표현합니다. ‘트랜스포머’ 칵테일의 경우, 파란색과 빨간색을 이용하여 트랜스포머의 옵티머스 프라임을 표현합니다. ‘주토피아’나 ‘어벤저스’처럼 역동적인 영화들은 칵테일도 화려한 과일 장식과 다양한 재료의 질감을 이용해 영화의 분위기를 살립니다. 메뉴판에 없는 영화도 점장이 본 영화라면 즉석으로 만들어 줍니다. 추억의 영화가 눈 앞의 칵테일로 펼쳐지는 경험은 8월의 고래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변주입니다.


‘트랜스포머’(좌)와 ‘타이타닉’(우) ⓒ트래블코드


8월의 고래가 있는 시부야는 신주쿠, 하라주쿠와 함께 도쿄의 3대 번화가 중 하나로, 하루 약 3백만 명이 오가는 상업지구입니다. 시부야역 앞의 ‘시부야 스크램블’은 신호가 한 번 바뀔 때마다 약 3천명이 동시에 지나간다고 합니다. 특히 밤 늦게까지 영업하는 식당, 클럽, 바 등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상점들간 경쟁이 치열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 위해 간판을 크고 화려하게 꾸민 다른 상점들에 비하면 8월의 고래의 외관은 다소 평범하고 소박하기까지 합니다. ‘Cocktail BAR’라고 쓰여져 있는 정사각형의 작은 간판에 더 작은 글씨로 ‘八月の鯨(8월의 고래)’라고 쓰여져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우연히 들르기보다는 아는 사람들이 일부러 찾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의 고래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경험덕분에 늘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서 영감을 얻고, 영감에 창의력을 더해 독창적인 변주를 이끌어낸 결과입니다.


8월의 고래 간판 ⓒ트래블코드

본 칼럼은 경제 전문 미디어 <이코노믹 리뷰>의 전문가 칼럼에 연재하고 있는 <최경희의 밑줄 긋는 여행>의 5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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