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정 지음, 사계절
1970년대의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어릴 때 우리 집에 나를 위한 책은 없었다. 을유문화사의 세로쓰기 문고판들과 영어책과 시집들이 아버지 책상 근처에 쌓여 있을 뿐,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창고에서 언니가 읽던 고전읽기책이 발견되었다. 쥐오줌으로 얼룩진 누런 갱지의 책들에는 두 남자가 방귀시합하면서 절구통을 이리저리 날리고,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가고, 호랑이에게 잡혔다가 형님이라 부르고 구사일생 빠져나오는 등등 어릴때 몇번쯤은 들었음직한 이야기들이 쓰여 있어서 몇날 며칠을 즐겁게 읽었다.
아무 책이나 글씨가 쓰여 있으면 다 읽어대는 통에 초등학교 때 벌써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마농레스꼬' 같은 책들을 마치 '읽은' 것으로 착각했던 나는 그러나 유난히 방귀쟁이 며느리, 며느리밥풀꽃 이야기, 밥안먹는색시 등 결혼 후 여성의 삶 이야기들은 다시 찾아보지 않았다. 어린 내 눈에도 부당해보였던 며느리의 처지가 불편했던 모양인데 아마 어릴 때부터 엄마의 시집살이 이야기를 들었던 탓이었는지 모르겠다.
결혼 후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아이들이 골라와서 읽어달라고 하면 모를까, 내가 직접 골라 전래동화나 공주이야기들은 별로 읽어주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전래동화의 비밀코드>라는 정신과전문의 하지현 씨의 책을 읽었다. 그는 권선징악, 해피엔딩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전래동화는 아이들 마음의 기초공사 같은 것이어서 어릴 때 전래동화를 많이 읽은 아이들이 더 건강한 자아를 갖게 된다고 했다. 영 멘탈이 약한 것 같은 내 아이들이 전래동화를 안 읽어서 그런가 잠깐 반성해보기도 했지만 절도 납치 강간 감금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같은 선녀와나무꾼, 방귀 뀐다고 쫓겨났다가 돈벌이가 되니 다시 받아들여지는 며느리 이야기를 재미있다는 듯 읽어줄 수는 없었다. 방귀뀌는 며느리는 쫓겨날 사유지만 방귀뀌는 남자는 마을을 대표해서 시합에 나가 응원받는 상황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며칠 전, 한 아이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을 묻자 나도 모르게 사계절에서 나온 신세정의 <방귀쟁이 며느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맙소사! 방귀쟁이 며느리가 재미있다니. 결혼 전 마음대로 뀌던 방귀를 결혼하고 참느라 얼굴이 누렇게 변한, 그러다 허락받고 뀌었더니 너무 과하여 결국 쫓겨나고 마는, 쫓겨가는 길에 높은 나무에 열린 배를 방귀로 따주고 사례를 받는 걸 보고 시집에 다시 받아들여지는데 그게 또 좋다고 다시 들어가는 그 며느리 이야기를 내가 좋아한다니.
그런데 신세정의 그림책을 보다 보면 얼토당토 않고 부당하기 짝이없는 텍스트보다는 해학 가득한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다. 표지부터 그렇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차용해 그린 그림이다. 풍속도를 다룬 책들에서 몇 번이나 봤음직한 장면들을 배경으로 사용한 것도 정말 일품이다. 주인공이 결혼 전에는 틀 바깥에서 밝은 표정으로 있다가 결혼하고 틀 안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시들어가는 표현력이라니.. 아, 이 기분은 정말 결혼해 본 여자들만 알지.
신세정의 그림책은 한 번 한 번 읽을 때마다 새로운 그림과 새로운 암호들이 보이는 듯해서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그래, 이런 게 바로 그림책의 매력이지.
이 맛에 나는 오늘도 그림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