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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경화 Apr 15. 2020

<빨강이 최고야>,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캐시 스틴슨 글, 로빈 베어드 루이스 그림, 미디어창비

딸아이의 친구가 엄마가 되었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만으로 스물 하나에 엄마가 된 것이다.

갓 스물을 넘기고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마음 한쪽이 영 시려웠다. 어릴 때 엄마와 헤어지고 아빠, 오빠랑 함께 살면서 고등학교 때 벌써 오빠 도시락도 싸주고, 집안도 깨끗이 치우고 주부 노릇을 절반쯤은 하던 아이였다. 듣자하니 새엄마가 있을 때도 있었다는데 아빠와 딸 사이를 멀어지게 해서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결국 이 아이는 중년 여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중년 여성 교사 앞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떨곤 했다한다.


결혼을 하던 날, 얼굴 두어 번 본 게 전부였던 그 아이에게 따로 밥값을 쥐어주면서 신혼여행 가서 한 끼쯤은 근사한 곳에서 사먹으라고 했었다. 뭐라고 편지도 써줬던 것 같다. 앞으로 꽃길만 걷길 바란다는 축복의 내용이었으리라. 그러나 결국 일년만에 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이혼을 했다. 그러니까 스물에 결혼을 해서, 스물 하나에 엄마가 되고, 스물 둘에는 젖먹이 아이가 딸린, 돈 한 푼 없는 이혼녀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엄마 없이 감내하는 아이가 안타까웠다. 


다행히 세상 철없는 친구들이 가끔씩은 도움이 되어서, 일년에 한두 번 테마파크에 갈 때면 그 친구와 아이도 다함께 데려가고, 친구가 지치면 드디어 자신들에게 기회가 왔다며 아이 엄마는 하루종일 아이 곁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공원으로 수영장으로 목욕탕으로 아이를 끌고 다닌다. 

가난한 싱글맘에게 정부에서 무상으로 교육의 기회를 주는 모양인데 그 제도가 어찌나 엄한지 한두 번만 결석하면 더이상의 기회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아서 계획만 세우는 사람들이 뭘 알겠는가.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라도 데려갈라치면 아이 맡길 곳이 없으니 엄마가 학원을 빠져야 하는데, 그런 사정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럴 때면 또 친구들이 톡에 공지를 띄워서 시간 되는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병원도 데려가고, 집에서 돌봐주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고 드디어 며칠 전에 애견미용사로 취업에 성공했다고 또 다들 파티다. 


조카가 생겼다며 누구보다도 그 친구와 아이를 잘 챙기는 딸아이는 그 친구를 만나고 올 때마다 조금 우울해한다. 가장 마음 아픈 건 친구가 아이에게 너무 엄하다는 것이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고, 예절을 가르치는데 그 태도가 너무 엄격하다는 것이다. 아빠 없이 자라서 버릇 없다는 말을 들을까 걱정한다는 걸, 어릴 때 위인전에서나 봤는데 아마 그런 마음인 듯하다고 그래서 친구에게 뭐라 할 수도 없다고 속상해한다.


왜 아니겠는가. 그러지 말라고 백번 말해도 모를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딸아이를 통해 가끔 그림책을 보내는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하야시 아키코의 <달님 안녕>은 아이를 위한 그림책이었지만 백희나의 <알사탕>은 엄마를 위한 그림책이었다. 김상근의 <별낚시>도, 사토 와키코의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도 모두 엄마의 힐링을 바라고 보낸 책이었다. 


캐시 스틴슨의 <빨강이 최고야>는 아이를 조금은 받아줘도 된다는 뜻으로 보낸 그림책이었다. 책 속의 아이는 빨강을 좋아한다. 아무리 엄마가 이 치마에 하얀 양말이 어울린다고 해도 신으면 높이 뛸 수 있을 것 같은 빨간 양말을 신고 싶다. 아무리 추워도 빨간 모자가 될 수 있는 빨간 외투를 입고 싶고, 구멍이 났어도 눈을 잘 뭉칠 수 있는 빨간 장갑을 끼고 싶다. 아이가 빨강을 좋아하는 이유는 '빨강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내가 사는 게 팍팍할수록, 내가 체력이 힘들수록 아이에게 각박하게 대했다. 그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굳이 그렇게 키우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는 것이었다. 구멍난 장갑을 끼어도, 안어울리는 양말을 신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만 아니면 그냥 내버려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한테 누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잘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육아책을 머리맡에 놓고 책대로 키우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으니까. 


딸아이의 친구도, 그리고 그 친구의 딸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힘든 시절을 이겨내고 정말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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