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2
#1.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오후,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선반 위에 놓인 존 레논의 그림 모음집을 발견했다. 전시 일정을 찾아보니 마침 패서디나에서 전시가 열릴 예정이었고 (밸런타인을 맞아 딱 3일만 열리는 전시였다), 10년 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도 어쩐 일인지 패서디나에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주 주말 바로 패서디나로 떠났다.
우연이 만들어낸 즉흥적인 결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순간이 이 여행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새로운 여정을 알리는 수많은 신호들을 놓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깃발은 펄럭이고 경적은 울리고 있었는지도. 그러니까 우리의 여행은 도서관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그 책의 책장을 여는 순간 운명처럼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2. 세 갈래 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하다
패서디나로 향하는 세 갈레의 길이 있다. 가장 빠른 길은 내륙을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하고 건조한 벌판을 지난다. 가장 아름다운 길은 서쪽으로 드넓은 태평양을 품고 달린다. 굽이굽이 물결치는 해안선을 따라 굽이굽이 시간이 흐른다. 두 길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길은 산과 들과 바다와 도시를 지나는 역사적인 길이다. 시간과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두 축으로 놓고서 저울질을 시작한다. 눈금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비로소 한 곳을 가리킨다.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포기한 것에 대한 미련보다는 내가 한 결정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련이 생기면 다시 가보면 될 일 아닌가!
#3. 길을 달리며 길에 대해 생각하다
처음엔 가로등이겠거니. 그런데 가로등이라기엔 너무 낮아서.
그다음엔 표지판이겠거니. 그런데 표지판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아서.
반나절을 달리고 나서야 문득 깨달았다. 이것은 무엇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제야 바깥 차선으로 차를 바짝 붙이고 다음 사인이 나오길 목 빠지게 기다렸다가 쌩~ 하고 지나치는 0.1초의 시간 동안 안간힘을 다해 글자를 읽었다.
Historic
El Camino Real
El Camino Real(엘 까미노 레알)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을 지나는 길 이름이었다. 매일 지나다니는 동네 길 이름이 시속 80마일로 6시간을 넘게 달려온 이곳에 붙어있는 게 신기하여 인터넷을 검색했다. 대략 파악한 바는 이렇다.
El Camino Real. 스페인어로 의미하는 것은 The Royal Road.
18세기 후반 스페인 선교사들이 멕시코 바자 캘리포니아에서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이르기까지 서쪽 해안을 따라 개척한 길이다. Camino real (까미노 레알)은 스페인 왕의 지배 하에 있는 길을 뜻했는데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로는 거의 쓰이지 않다가 20세기 초 미션 부흥 운동이 일면서 ’El Camino Real’이라는 이름을 다시 부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역사를 기리기 위해 우리가 지나치면서 본 기념비를 세웠다.
나는 패서디나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엘 까미노 레알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길’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루에도 많은 길을 지나치지만 이 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존재하는 길이라는 것은 없는데도 말이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가다 보니 그곳에 길이 있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존재하는 길만 따라갈 줄만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막다른 골목에 들어와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은 아무 길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고립되어 있다.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두렵고 외롭다. 그래도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가는 엘 까미노 레알과 같은 중요한 길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누군가는 나와 함께 걸어주지 않을까, 와 같은 희망을 생각했던 것 같다.
#3. 존 레논의 작품을 둘러보며
정말 대충 그린 것 같군.
이렇게 대충 그렸는데 작품이 될 수 있다니.
하느님, 하느님은 정말 불공평합니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능력을 주시다니 말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존 레논처럼 살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아니, 그러니까 존 레논처럼 죽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방금 불공평하다는 말은 취소할게요.
그림 보려고 여덟시간이나 달려와서 한다는 생각이 고작 이런 것이라니
흠, 지금까지 한 생각도 취소할게요.
#4. 푸른 타일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 만에 처음 만난 친구 서정이는 패서디나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담쟁이덩굴이 자라는 푸른 타일의 카페로 우리를 안내했다.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화려한 타일 장식의 건물은 기대치 못한 놀라움을 선사했다. 역사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삶의 곳곳에 불쑥불쑥 나타나고 있었다.
처음 방문한 올드 패서디나를 나는 이렇게 기억한다. 여름 같은 겨울 날씨에 테라스에서는 가스난로를 피우며 스페인처럼 느껴지는 푸른 타일의 카페에서 늦게까지 차를 마시는 캘리포니아의 오래된 도시로.
#5.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기다
호텔이라기보다는 모텔에 가까운 숙소의 낡은 줄무늬 소파에 파묻혀 이 방에 묵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앉아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곧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뭐 별거 있겠어, 피곤하다, 얼른 씻고 자야지, 했겠지.
#7. 돌아오는 길 주유소에서
날아가는 새 깃털 하나 못 봤는데 이 새똥들은 도대체 어디서 떨어진단 말이더냐.
그래도 새들이 우리 차에만 똥을 싼 건 아닌 모양이다. (씨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