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손녀의 기억
1. 대가족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슬하에 여덟 자식을 두셨다. 아들이 일곱에 막내딸이 하나다. 그중 넷째로 태어난 우리 아버지의 둘째 딸인 나는 할머니에게 열세 번째 손주였다. 친언니를 제외하고 사촌언니가 여덟, 사촌오빠가 셋, 밑으로도 동생이 여섯이나 더 있는 까닭으로, 태생적으로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손녀는 될 수 없었다. 다만 효심 가득한 아버지 덕분에 명절 연휴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손주 1위에는 여러 번 오를 수 있었다.
언니와 나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의 첫인사는 다소 김빠지는 것이었다. “어디 보자, 누가 여진이고 누가 경진이로?” 지금까지 할머니가 살아계신다 할지라도 이 첫인사만큼은 변함이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 말이 한 번도 서운했던 적은 없다. 일대일 사랑은 아니었어도 할머니의 마음은 온 가족을 가득 덮고도 남을 만큼 넉넉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집은 대가족을 품기에 몹시 비좁았다. 부엌 한 칸, 방 두 칸이 전부였던 시골집은 서른 명이 넘는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부엌은 어머니들 차지였고, 방을 차지하신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옥상으로 올려보냈다. 한때 옥상에는 지붕이 높은 커다란 텐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텐트 안에 둥글게 모여 앉아 가장 큰 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동생들이 만날 때마다 이야기해달라고 졸라댔던 탓에 1번 손녀는 즉석에서 이야기를 지어내느라 진땀을 뺐지만 귀찮은 동생들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 대장 노릇을 잘해주었다.
이렇게 집 안을 가득 채운 식구들의 배를 채우는 일이야말로 할머니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할머니는 음식을 준비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셨다. 그런 할머니를 따라 밥 먹을 때가 되면 모든 식구가 일사불란하게 제 할 일을 했다. 덮고 있던 이불과 베개는 착착 개어 농 속에 집어넣고, 오빠들이 상을 펴면 동생들은 행주로 닦고 수저를 놓았다. 손이 빈 식구들은 이집트 벽화 속 한 장면처럼 쟁반을 들고 주방 앞에 일렬로 섰다가 어머니들이 퍼주시는 밥이며 국, 반찬을 상으로 날랐다.
다 같이 밥을 먹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차례로 밥을 먹었다. 가장 먼저 할머니, 할아버지와 남자 어른들을 위한 상이 차려졌다. 뒷사람을 위해 순식간에 밥 한 그릇을 해치우고 일어나는 삼촌들의 손에는 사용한 그릇과 수저가 들려 있었다. 빈자리가 생기는 대로 아이들이 밥을 먹었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들이 식사를 하셨다. 후식으로 과일과 식혜까지 먹고 나면 식사는 일단락되었지만, 설거짓거리가 산더미로 쌓였다. 어머니들이 뒷정리까지 마치시고 차가워진 손을 이불 속에 넣으며 겨우 한숨 돌리려 하면 곧 다음 끼니가 돌아왔다.
당시 내 관심사는 오직 사촌들과 재밌게 노는 것뿐이어서 밥 먹는 수고로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아궁이 앞에 서 계시던 할머니의 모습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1등으로 도착해 같이 놀 사촌이 없었던 13번 손녀는 하릴없이 마당으로 나 있는 작은 방의 문턱에 앉아 음식을 준비하시는 할머니를 구경했던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렇게 할머니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1등으로 도착한 손주에게만 주어지는 상이자 특권이었던 듯하다.
2. 아궁이
예천군 예천읍 한 골목 모퉁이에 자리했던 할머니 집은 아빠가 국민학교 시절부터 살았다고 했다. 초록색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멘트로 덮인 작은 마당과 크지 않은 집채가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태어나기 전 한 번 허물고 새로 지었다는 집은 내가 태어난 후에도 크고 작은 개보수가 계속되어 자주 모습이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는 안방과 작은 방 사이에 있던 재래식 부엌을 메꾸어 방을 넓히고 현대식 부엌을 들여온 것이다.
재래식 부엌은 사라졌지만, 마당 한구석에 놓인 아궁이만큼은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켰다.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나중에는 세 배로 불어난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긴 세월 아궁이 앞에 서 계셨다.
아빠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5, 60년대에는 우리 가족도 가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인자하시고 흐트러짐 없이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릴 줄 아는 멋쟁이셨지만, 생계에는 큰 도움이 안 되신 듯하다. 그래서 열 가족의 생계는 고스란히 할머니의 손에 달려있었다.
할머니는 주로 막걸리를 만들어 파셨는데, 그것만으로는 수입이 부족해서 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아빠도 형들과 함께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 어린 나이에 라디오 판매수리점의 견습공도 되었다가, 산림조합원의 급사도 되었다가, 여름에는 형과 함께 아이스께끼를 팔러 다니기도 했다는 아빠는, 할머니가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 지은 흰 쌀밥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하셨다.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었던 갓 지어낸 고두밥이 아빠에게는 가난의 기억이다.
할머니의 아들들은 부족한 환경에서도 착실하게 일해 각자 자리를 잡고 가정을 이루었다. 덕분에 다음 세대로 태어난 우리들은 적어도 먹을 것에 있어서만큼은 풍요를 맛보았고, 할머니가 만드는 모든 음식을 당연하게 받아먹을 수 있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아궁이는 불 잘 날이 없었다. 할머니는 며칠 전부터 쉬지 않고 음식을 하셨다. 가마솥에서 밥도 하고 국도 끓이고 묵도 쑤고 떡도 하셨다. 고기도 삶고 나물도 삶고 국수도 삶느라 구들로 연결된 안방은 뜨겁다 못해 아랫목 장판이 까맣게 눌어붙어 있었다.
한 번은 어른들이 할머니와 어린 손녀 다섯만 남겨두고 외출한 밤이 있었다. 칼날 바람이 부는 섣달그믐이었다. 할머니는 10cm도 넘는 두툼한 요를 꺼내어 아랫목에 깔았다. 가장 어린 손녀는 품에 안으시고 나머지 네 명은 요 위에 나란히 누웠다. 며칠 동안 쉴 새 없이 불을 때어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바닥의 열기는 곧 두툼한 이불을 뚫고 위로 올라왔다.
“할머니, 너무 뜨거워서 못 자겠어요!”
요 위의 손녀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각자 요의 한 귀퉁이씩을 부여잡고 무거운 요를 질질 끌어 부엌과 연결된 미닫이문에 바싹 붙였다. 그러나 아궁이의 열기는 이미 온 방을 잠식한 후라 윗목이라고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우리는 다시 요 귀퉁이를 부여잡고 한사코 말리시는 할머니를 뒤로한 채 문턱을 넘어 부엌으로 진군했다.
열탕에 있다가 냉탕에 들어온 것처럼 시원하고 짜릿했다. 이렇게 좋은 걸 진작에 나올 걸 그랬다며 깔깔 웃으며 “할머니, 우리는 여기서 잘 거예요!”라고 닫힌 문에 대고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여실히 깨달았다. 보일러가 없는 부엌에는 사방에서 매서운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한기는 요의 열기를 순식간에 빼앗았고, 곧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벌벌 떨게 되었다. 결국 10분도 안 되어 스스로 반란을 종결지은 우리는 다시 문턱을 넘어 할머니의 사랑이 절절 끓는 아랫목에서 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잠이 들었다.
이 기억은 한동안 잊혔다가 몇 년 전 참가한 어느 심리학 워크숍에서 불쑥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던 기억에 대해 그림을 그려보라는 강사님의 말에 나는 바로 할머니의 아궁이를 떠올렸다. 눌어붙은 장판과 그 위에 놓여있던 낡은 보온병 속의 보리차도 생각났다. 방바닥이 너무 뜨겁다며 깨금발을 하고서 폴짝폴짝 뛰던 어린 나와 사촌들이 있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할머니의 아궁이가 내 기억 속 따뜻함의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3. 할머니의 음식
할머니의 아들들은 할머니의 음식 중 메밀묵을 가장 좋아했다. 할머니는 메밀을 깨끗하게 씻어 물에 불렸다가 방앗간에 가져가 거칠게 빻아오셨다. 빻은 메밀에 물을 부어가며 전분을 우려낸 후 천에 싸서 곱게 걸러주면 가마솥에 끓일 메밀 물이 준비되었다. 묵을 쑬 때는 바닥이 타면 안 된다며 할머니는 노처럼 생긴 커다란 주걱으로 가마솥을 휘휘 저으셨다. 할머니, 엄마, 아빠가 번갈아 가며 묵을 젓다가 "아이고 팔이야, " "아이고 허리야, " 하는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면 곧 묵이 완성된다는 신호였다. 준비해둔 틀에 걸쭉해진 묵을 내려 식히면 두툼하고 탱글탱글한 메밀묵이 완성되었다. 반나절이 꼬박 걸리는 고된 작업이었다.
할머니의 묵은 그냥 먹어도 맛있었지만 태평추를 만들어 먹으면 더 맛있었다. 먼저 적당한 크기로 썬 돼지고기(기름기가 살짝 붙어 있는 것)를 큰 프라이팬에 넣어서 볶다가 어느 정도 익으면 고기가 눌지 않도록 다시물을 조금 부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이고 채 썬 묵과 그 위에 듬성듬성 썬 대파를, 다시 그 위에 잘게 썬 김치를 듬뿍 얹고 뚜껑을 닫아 뜸을 들였다. 마지막으로 고춧가루가 들어간 양념장으로 간을 맞추고 참기름과 김 가루를 뿌리면 음식이 완성되었다. 전체를 골고루 섞은 후 그릇에 퍼서 먹으면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모두들 말도 없이 숟가락으로 후룩후룩 묵을 퍼먹다 보면 금세 그릇 밑바닥이 드러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더는 직접 쑨 묵을 먹을 수 없지만, 태평추는 아직도 식구들이 즐겨 먹는 음식으로 남아있다. 삼촌들은 술 한잔하시거나 화투를 치시다가 출출해지면 시장에서 사 온 묵으로 태평추를 만들었다. 전기 불판에 오손도손 둘러앉아 할머니가 해주시던 방법 그대로 묵을 볶으면 할머니의 손맛만큼은 아닐지라도 아주 맛있는 묵 요리가 탄생하곤 했다. 나는 할머니한테서 나온 이 맛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해 두었다가 언젠가 내 아이가 생기면 이 음식을 맛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메밀묵만큼이나 인기 있었던 할머니의 음식은 칼국수다. 할머니는 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래된 나무 도마 위에서 칼국수를 밀었다. 넓게 펴진 반죽을 밀대에 겹겹이 감아 다시 한번 밀어내면 종잇장처럼 매끈하고 얇은 반죽이 밀려 나왔다. 그렇게 밀어낸 반죽을 반듯하게 접어 또각또각 썰어내면 국수면은 완성이었다. 손으로 면을 살살 털어 남은 밀가루를 날리고, 광주리에 받쳐 마당으로 가져가면 가마솥에는 이미 준비된 육수가 끓고 있었다. 면을 넣고 뭉치지 않도록 잘 저어주면 곧 국물 색이 하얗게 올라오며 칼국수가 완성되었다. 할머니 집에서는 잔치 국수처럼 양념장을 얹어 각자 간을 맞춰 먹었다. 할머니의 국수는 부드러우면서도 쫄깃쫄깃해 정말 맛이 있었다.
한번은 할머니께서 다 삶아진 국수를 마당에 쏟은 사건이 있었다. 며느리가 옮기겠다는 것을 본인이 힘이 더 세다며 손수 들고 옮기시다가 잘못해 발을 헛디딘 것이었다. 공들여 완성한 국수가 한순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뜨거운 면과 국물이 할머니 발등으로, 시멘트 바닥으로, 사방으로 튀었다. "아이고, 저 국수를 우짜노!" 할머니는 본인 발이 덴 것도 모르시고 쏟아진 국수가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르셨다. 어쩔 수 없이 그날 점심은 아빠가 뛰쳐나가 사 온 소면으로 대체했다. 칼국수를 못 먹은 것은 괜찮았지만 상한 할머니의 마음이 부푼 발등보다 아파서 얇은 소면도 목에 걸렸다.
언니와 내가 제일 좋아했던 음식은 쑥떡이었다. 할머니는 매년 보드라운 쑥이 올라오면 산으로 들로 쑥을 뜯으러 다니셨다. 몇 광주리 가득 쑥이 쌓이면 잘 쪄서 말렸다가 쑥떡을 만드셨다. 방앗간에서 빻아온 찹쌀가루와 말린 쑥을 버무려 찜기에 쪄내면 이걸 어떻게 먹을까 싶은 형체 없는 진녹색 덩어리가 탄생해 있었다. 할머니는 떡을 덩어리째 방으로 들고 들어와 칼국수를 밀던 그 자리에서 떡을 성형하셨다. 대접에 받아놓은 물에 손을 살짝 적신 후 떡을 적당한 크기로 떼 콩가루가 수북이 담긴 쟁반 위에 놓고 꾹꾹 눌렀다. 얇게 펴야 콩가루가 많이 묻어 더 맛이 난다며 양쪽으로 뒤집어가며 꼼꼼하게 늘린 쑥떡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었지만 하나같이 얇았다.
그렇게 콩가루 듬뿍 묻은 쑥떡을 손으로 건네주면 온 가족이 그 앞에 앉아 떡을 받아먹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콩가루 맛 사이를 비집고 쌉싸름하면서도 향긋한 쑥 향이 진하게 밀려왔다. 할머니의 쑥떡에는 떡보다 쑥이 많아서 쑥의 질감이 그대로 씹혔다. 얇은 떡을 두세 겹 접어서 한입 크게 베어 물면 이빨 자국 사이로 부드러운 쑥 줄기가 따라 나오곤 했다. 그렇게 다 같이 손에서 손으로 쑥떡을 받아먹는 날이면 콩가루가 폴폴 날려 할머니의 머리카락 위에도, 옷 위에도, 온 방 안에 콩가루 눈이 내렸다.
할머니는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봄, 가슴이 답답하시다며 동산재에 오르셨다가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다. 쑥이 지천으로 솟아나던 예쁜 날이었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준비 없는 이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맞닥뜨린 가족의 죽음이 무섭고 어려워서 할머니께 전할 마지막 인사도 생각해내지 못한 채 할머니와 작별해야 했다. 나는 아직도 매년 쑥 뜯는 봄이 되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4. 밥 짓는 시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난 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정리하던 나는 문득 할머니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셨을까 궁금해졌다. 우리가 좋아했던 음식은 이렇게나 많은데 정작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음식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이 없어서였다. 나는 단답식 대답을 기대하며 아빠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참을 생각하시던 아빠는 뜻밖에도 “돌이켜보면 자식들이 불효한 기억밖에 나지 않는구나”하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가볍게 던진 질문에 뒤통수를 때리는 묵직한 대답이었다.
아빠는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음식을 몰라서가 아니라 가족들 먼저 챙기느라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늘 뒷전으로 미뤄두셨던 할머니의 모습이 생각나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보리밥에 나물 비벼 먹는 것과 소고기와 곰국을 좋아하셨다는 할머니께,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음식을 더 자주 대접해드리지 못한 게 속이 상하셨을 테다. 누군가가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 또한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엄마는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을, 첫째 딸과 둘째 딸이 잘 먹는 음식부터 챙기느라 본인이 먹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내색한 적이 없으셨다. 결국 나도 잘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가볍게 던진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할머니와 엄마의 밥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나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그들처럼 부엌 앞에 서 있다. 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 중 얼마만큼을 밥하는 데 써야 할지 자주 고민한다. 그들의 노력에 비하면 나의 노력은 이미 반의반도 안 될 만큼 줄어있는데도 나는 밥하는 일이 고되다고 느낀다. 어떤 날은 텅 빈 냉장고를 보며 나는 왜 이만큼밖에 못할까 싶다가도 어떤 날은 나는 왜 이렇게 밥을 하고 있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남편과 나는 자주 외식을 하고, 배달 음식을 먹고, 할머니는 생전에 보지도 못하셨을 다양한 외국 음식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몸과 마음이 지칠 때마다 결국 돌아가게 되는 곳은 어렸을 적 먹었던 할머니의 음식이고 엄마의 음식이다.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음식을 전수받은 적은 없지만 나는 엄마의 음식에서, 엄마로부터 배운 나의 음식에서 할머니를 본다. 신문지를 깔아놓고 멸치 똥을 따면서, 마늘 껍질을 벗기면서, 커다란 냄비에 각종 재료를 넣고 진한 육수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는 이 일을 수없이 반복했을 할머니와 엄마를 생각한다.
결국 오늘도 내가 밥을 짓는 이유는 할머니의 아궁이 때문이다. 절절 끓던 방 안에서 다 같이 밥을 나눠 먹던 기억이 너무 소중해서 집밥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제는 쉬었지만 오늘은 밥을 하고 내일 또 쉬더라도 모레는 다시 정성스레 밥을 한다. 할머니와 엄마만큼은 아니겠지만 소중한 사람을 위해 밥을 짓고 다 같이 나눠 먹는 시간만큼은 모두의 노력으로 지켜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