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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의 발

박준의 시 1

by 황경진


1. 낙타와 사막


20대 중반 취업을 준비할 무렵 종종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상상을 했었다. 그 공간이 내게는 사막이었다. 한번도 가본 적 없어서 머릿속에서 짜집기한 허구의 공간에 불과했지만 마음의 피란처로서 그럭저럭 써먹을 만했다. 그런데 사막을 떠올리면 1+1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낙타가 함께 떠올랐다. 어지간히도 논리에 맞지 않는 연상작용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낙타가 "있다"니.


나이가 들어 처음 가 본 사막은 모하비 사막이었다. 상상 속 사막과 많이 달랐다. 바람에 물결치는 모래 언덕도 낙타도 보이지 않았다. 미국에 낙타가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지만 문득 궁금해지긴 했다. 미국 사막엔 왜 낙타가 없을까? 재미 삼아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는데 뜻밖의 흥미로운 자료가 눈을 끌었다. 낙타의 조상은 현재의 미국 땅에서 진화하기 시작했다는 것.


낙타의 먼 조상은 진화하면서 점점 북쪽으로 이동해 빙하기에 드러난 베링 육교를 건너 구대륙으로 넘어왔다. 낙타는 사막에 정착하기 전 극지방에서 살아남는 법을 먼저 익혀야 했다. 지방을 저장하는 등에 솟은 혹과 넓고 평평한 발바닥, 커다란 눈, 선인장도 씹어먹는 구강 구조와 소화 시스템은 사막이 아닌 극지방에서 진화한 흔적으로 여겨진다.


다른 동물들이 경쟁자와 포식자와의 치열한 관계 속에서 생존 전략을 모색할 때 낙타는 경쟁 사회를 벗어나는 방법을 택했다. 경쟁자도 포식자도 없는 세계에는 대신 극한의 자연환경이 있었다. 낙타는 사막 한가운데 숨을 그늘이 없으면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본다고 한다. 머리로 그림자를 만들어 몸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다. 태양과 맞짱 뜨는 그 배포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도 2, 3주를 버텨내는 강인한 생존력이, 하지만 강함을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고 느리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인내력이 낙타를 사막에서도 살아남게 했다.


나는 낙타를 닮고 싶었다.


2. 미인과 사막


수년간 변함없었던 내 이상향 속 사막과 낙타의 이미지에 큰 충격을 가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시인 박준 씨의 "미인의 발"(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에 수록) 시를 읽게 된 것.


미인의 발


박준


"반디미용실에서 처음 낙타를 보았습니다" (첫 문장부터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미용실에서 낙타를 보다니 어떻게? 이어서 든 생각은 대략 이 정도였다. 벽에 걸린 달력에 낙타 사진이 박혀 있었다거나 낙타가 나오는 테레비 방송을 보고 있었다거나. 물론 나 같은 범인이 1초 만에 생각해낼 수 있는 이런 진부한 설정이 박준 씨의 시에서 연출될 리는 없었다. 다음 문장은 마침표 없이 줄글로 이어졌다) "미용실 누나는 쌍봉낙타 봉 같은 가슴 사이에 제 머리를 묻고 비뚤어짐을 가늠했고 ..." (이하 생략)


오 마이 갓. 쌍봉낙타 봉 같은 가슴이라니. 한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을 이 기가 막힌 비유에 머리가 빙글 돌았다. 아아 박준 씨, 내가 닮고 싶은 낙타에 미용실 누나의 가슴선을 그려 넣으면 어쩌란 말입니까! 앞으로 낙타를 떠올릴 때마다 쌍봉낙타 봉 같은 가슴을 함께 떠올려야 하다니 나는 박준 씨에게 따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쥬시후레시를 건초처럼 씹는 미용실 주인의 잔소리""푹푹 발이 빠졌던" 미인은, "동네 아저씨 술자리의 기본 안주가 되기도 하고 아주머니들의 커피 잔에서 설탕과 함께 휘저어지던" 미인은 날아 들어온 담뱃불이 미용실을 까맣게 태웠던 날 그곳을 떠나야 했다.


"낙타가 사하라로 갔는지 고비로 혹은 시리아 사막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마음을 걷던 발자국은 아직도 남아 저는 요즘도 간혹 그 발자국에 새로 만나는 미인들의 흰 발을 대어보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로 마무리되는 화자의 고백에는 애잔함이 묻어났다.


시는 끝나고 너무나 강력했던 쌍봉낙타 봉 같은 가슴의 이미지도 조금씩 사그라들고 미지의 사막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미인의 모습만 남았다. 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수년간 그려왔던 내 상상 속 사막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펼쳐졌고, 낙타가 있던 자리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미인이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낙타의 모습 속에 나를 숨겨놓고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사막에서 살아남지 못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새로 온 낙타는,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갔을 미인은 이곳에서 꼭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어디로 가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너무 머지않아 돌아오기를 바라며, 모래에 빠지지 않도록 낙타의 발을 신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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