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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페 스케치

by 황경진

언제부터인가 여행스케치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오면 아무 데나 걸터앉아 그림을 그리는 게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작정 스케치북을 들고 밖으로 나간 날이 있었다. 좋아하는 풍경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데 마음과는 달리 잘 그려지지 않았다. 30분을 끙끙대다가 그리고 싶다고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닫고 결국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난 후 집 근처 갤러리에서 ‘건축 드로잉’ 수업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주 야외에서 도시 풍경을 그리는 8주 짜리 프로그램이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수업이라는 생각이 들어 망설임 없이 등록했고, 그곳에서 마틴 선생님을 만났다. 본업이 건축가인 마틴은 취미로 여행스케치를 해왔는데 어쩌다 보니 전시도 열고 워크숍도 진행하는 예술가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수업 첫날 마틴은 본인의 스케치북을 여러 권 들고 와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색이 바랜 것부터 최근 것까지 스케치북은 길에서 그린 작품들로 빼곡 차 있었다. 마틴은 동네 문방구에서도 살 수 있는 Sharpie 펜 한 자루와 회색 마커로 그림을 그렸다. 마틴의 선은 대담하면서도 정갈했고, 생략된 선과 단순한 음영만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표현해내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마틴의 작품: http://martinbernsteinarchitect.com/travel-drawing)


우리는 매주 밖에서 그림을 그렸다. 마틴은 원근법과 소실점에 대해서, 거리와 크기를 측정하고 종이에 옮기는 방법에 대해서 직접 그림을 그려가며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수업 시간은 세 시간이나 되었지만, 어설픈 실력으로 더듬더듬 선을 잇다 보면 결국 얼마 그리지 못한 상태에서 수업이 끝나곤 했다. 그렇게 훌쩍 8주가 흘렀다.


걸음마를 떼자마자 프로그램이 끝나버린 게 너무 아쉬워서 같은 수업을 한 번 더 신청했다. 이전 수업에서 방문했던 장소를 다시 방문하고 똑같은 풍경을 반복해서 그렸다. 신기한 것은 그사이에 따로 연습한 게 없는데도 첫 번째 그림보다 두 번째 그림이 월등히 좋아졌다는 점이다. 마틴은 수업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예로 들며 반복의 힘을 강조했다. 나의 형편없는 첫 번째 그림이 학생들에게 공개되는 게 민망했지만 내가 봐도 반복의 힘은 대단한 것 같아서 마틴의 요청에 따라 처음과 두 번째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짧은 영어로 열심히 설명했다. 그렇게 두 번째 수업도 끝이 났다. 여전히 여행스케치라 부를 만한 그림은 그리지 못했지만 적어도 혼자서 시도해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산타페로 왔다. 이제는 실전에 돌입할 준비가 되었다.




나는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산타페의 모습을 담으려 애썼다.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여유롭고 어쩌면 낭만적인 것으로 비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현실은 소리 없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갈등은 장소의 물색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되도록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풍경이 잘 보이면서 구석진 자리는 없었다. 어떤 때는 관광객이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복잡한 길의 인도에 주저 앉아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이 없고, 관심 있는 소수는 어떤 이상한 그림을 보여주어도 “뷰티풀!” “골져스!”와 같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지만, 그걸 알면서도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공개된 장소에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자리를 잡고 앉으면, 다음에는 펜과 연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펜으로 그리느냐 연필로 그리느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지만, 연필을 잡으면 나도 모르게 지우게 된다는 게 문제였다. 그림을 자꾸 지우면 완성하기도 어렵고, 실력이 잘 늘지 않아서 연습의 관점에서 보자면 잘못 그리더라도 지우지 않고 그리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펜을 집으려고 노력했지만, 대부분은 지울 수 없는 두려움에 패하고 연필을 집어 드는 바람에 스케치북의 많은 면이 연필 자국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그래도 몇 번은 싸움에서 이겨 처음부터 끝까지 펜으로만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는데 그런 날에는 그림을 끝내고 나면 정말 뿌듯했다.


다음으로는 조급증과의 싸움이었다. 나는 시간이 넘칠 정도로 많았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림을 빨리 그려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행스케치의 미덕은 최소로 최대를 그려내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최소로 그리는 것을 대충 빨리 그리는 것으로 착각했던 게 아닐까 싶다. 어느 날 스케치북을 넘겨보며 내 그림은 왜 이렇게 엉망진창일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다음부터는 의식적으로 천천히, 자세히 그리려고 노력했다. 예전보다 시간을 많이 들이자 당연한 얘기지만 완성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역시 탑은 공들여 쌓아야 했다. 이곳에 공개한 그림은 대부분 후반부에 스케치한 작품이라 그나마 볼 만한 그림이 되었다.


여행스케치를 하면서 예전에 가졌던 동경과 환상은 사라졌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마음의 부담도 큰 일이지만 체력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 보면 엉덩이가 배기고 다리도 저렸다. 해의 위치가 바뀌어서 그늘이 땡볕이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게 가장 곤란했다. 옆에 누구라도 있으면 짐을 맡겨두고 다녀올 텐데 혼자인 나는 온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화장실을 찾아 헤매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어찌 됐든 목표했던 스케치북 한 권을 모두 채웠다. 어떤 상황에서도 본인이 그린 그림을 사랑해주어야 한다고 어떤 그림 작가는 말했지만 나의 심성은 그 정도 아량은 갖추지 못해서 지금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스케치를 시도하고 꾸준히 그린 점은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약 세 달 가량 그림을 그리러 다니면서 야외 스케치가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림을 시작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생략과 함축으로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무엇을 생략할 수 있는지 판단하기가 더 어려워서 벽돌의 개수까지 세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두세 시간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고 나면 체력이 고갈되어 집에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날에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고 공원 벤치에 누워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퇴근할 때 나 좀 실어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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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산타페의 명물인 샌프란시스코 성당 /(우) 성당 앞 원주민 성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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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고딕 양식의 로레토 채플 / (우) 산타페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라폰다 호텔
3. San Miguel Chapel.jpg
6. Cafe Pasquel.jpg
(좌)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산 미구엘 채플 (우) 산타페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 "카페 파스쿠알"
5. Caf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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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가던 카페와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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