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 화요일의 일기
내 왼쪽 눈 안쪽에는 20년 가까이 혹이 자라고 있다.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처음 발견하고 안과에 갔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는 혹이 눈물샘에 붙어 있어 잘라내는 게 까다로우니 더 자라지 않는다면 그냥 두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다행히 혹은 더 커지지 않았고 특별히 불편한 점도 없어서 지금껏 그냥 살았다.
그런데 올해 봄, 20년 동안 잠자코 있었던 혹이 처음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미국에 온 후로 꽃가루 알레르기가 생겼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심해지더니 올해는 눈에까지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한 달 전 꽃가루 날리는 철이 되니 참을 수 없이 가려워지면서 혹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간지럽고 따끔거리고 다른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워 결국 안과를 예약했다.
이 동네는 병원을 예약할 때마다 속이 터진다. 신규 환자를 잘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한 번 들어가면 다음부터는 예약이 쉬워지지만 첫 방문은 어느 곳이든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여서 한 달 뒤에 첫 진료를 잡아주었고 그게 오늘이었다. 그동안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알레르기 안약을 사용했더니 증상은 거의 가라앉고 없었지만 예약해 놓은 게 아까워서 진료를 받으러 갔다.
혹을 떼자고 하면 바로 떼고 올 심산이었는데 혹은 떼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 했던 혹을 하나 더 달고 오게 되었다. 오늘 진료를 봐주신 비비안 선생님은 혹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라며 다른 선생님을 소개해 주신다고 했다. 그 선생님은 하필 출장 중이셔서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단다. 뭐 어쩌겠는가.
문제는 다음 말이었다. "그런데 혹시 Optic cup이 평균치보다 크다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나요? 제 소견으로는 glaucoma 검사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오늘 온 김에 검사를 받고 가실래요?" Optic cup은 뭐고 glaucoma는 또 뭔지. 선생님께 스펠을 물어가며 그 자리에서 단어를 검색했다. Glaucoma는 녹내장이라고 한다. What? 뜬금없이 녹내장?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눈의 신경이 모이는 부분에 Optic cup이라고 불리는 (한국어로는 안배라고 한다)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는데 녹내장이 진행되면 이 컵의 크기가 점점 커진다고 한다. 따라서 이 안배의 비율로 녹내장의 진행 정도를 측정하기도 한다. 정상적인 수치가 30% 정도라면 내 오른 눈의 안배 비율은 60%, 왼쪽 눈도 40%가 넘었다. 아시아인 중에는 선천적으로 비율이 높은 사람도 있고 지금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검사는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결국 오늘 몇 가지 검사를 받았고 금요일에 몇 가지 검사를 더 받기로 했다.
병원을 나오는데 일회용 셀로판지 선글라스를 건네주며 안약 때문에 눈이 많이 부실 테니 꼭 끼고 가란다. 이런 걸 끼고 어떻게 밖에 나가나 싶어서 일단 받아만 들고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눈이 부셔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빛이 내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주변이 하얗게 부서졌고 결국 셀로판지 안경을 주섬주섬 주워 쓸 수밖에 없었다. 주차장에 도착해 차 안에 둔 제대로 된 선글라스로 바꿔 꼈지만 그래도 역부족이라 그 위에 셀로판지 안경을 덧댈 수밖에 없었다. 화창하게 맑은 날이 미세먼지가 잔뜩 낀 듯한 누런 세상으로 변했고 나는 그 어두침침한 세상을 엉금엉금 운전해 집으로 돌아왔다.
혹 떼러 갔다가 녹내장 검사를 받고 돌아오는 기분이라니. 별일이야 있겠냐마는 혹 하나 더 붙여온 것 같은 무거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