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엘도라도를 찾아서

by 황경진

길었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풀었다. 산타페에 도착했을 때 빵빵하게 부풀었던 간장이며 참기름이 든 플라스틱병이 높아진 주변 기압에 눌려 홀쭉하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산타페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돌아오는 동안 원래 모양을 잃고 찌그러진 병을 보니 생각보다 기압 차가 심했구나, 실감하게 되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온 것뿐이데 한동안 기분도 그랬던 것 같다. 터질 듯 부풀어 있던 여행의 기억이 도착하자마자 일상이라는 압력에 눌려 김이 빠지고 찌그러졌다. 뚜껑을 열면 병은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지만 공기는 섞이고 만다. 병 안의 공기는 더 이상 예전의 공기가 아니다. 언젠가 열어야 할 뚜껑이었지만 바로 열지 못하고 찌그러진 채로 한동안 방치해 두었다. 1년이 지나기 전엔 정리해야지 하면서 1년이 지났고, 2년이 지나기 전엔 하다가 2년도 지났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새로 일어났고 소소한 과거의 기억은 많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는 것은 진한 엑기스 같은 걸까.




뉴멕시코는 미국의 50개 주 중에서 가장 개발이 덜 된 주에 속한다. 땅의 면적은 다섯 번째로 넓지만, 인구 밀도는 뒤에서 네 번째로 낮다. 남한의 세배보다도 넓은 땅에 고작 200만 명(대구시의 인구보다 적다)의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 교육, 경제, 사회 인프라 등의 지표로 살기 좋은 주의 순위를 매기는 U.S.News&World Record 사의 발표에 따르면, 뉴멕시코는 2021년 기준 48위를 기록했다. 이 수치만 본다면 뉴멕시코는 별로 가보고 싶은 동네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조차도 남편이 출장을 가지 않았더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우연한 기회로, 혹은 운명 같은 기회로 산타페에서 3개월을 보내고 온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2박 3일 출장을 다녀온 남편이 나에게 밤새도록 이야기를 털어놓았듯이 나 또한 이야기를 접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여행을 정리하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글로 다 풀어냈다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빠졌을까 고민을 거듭하며 지난 달력과 사진첩을 다시 들춰 보다가 무더기의 사진 속에서 힌트를 던져주는 한 장의 사진을 찾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빠뜨렸던 것은 너무 소소해서 따로 기록해놓지 않았던 지나가며 마주친 풍경들이었다. 뉴멕시코의 흔하고 흔한 풍경들. 달력에 적어놓은 일정과 일정 사이의 빈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풍경들 말이다.


뉴멕시코는 하늘도 땅도 너무 컸다. 사람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는 날것의 땅에 그냥 내던져지는 느낌이었다. 미국에 살면서 내로라하는 국립공원을 많이 다녀왔지만 그때 느꼈던 경이로운 감정과는 결이 달랐다. 명확한 목적의식과 기대를 갖고 이미 내놓은 길을 따라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오는 이전의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먹먹함이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마주치는 거칠면서도 아름다운 풍광들. 빛과 찰나의 시간 같은 것들이 내가 잊고 있었던 정말로 중요한 보물이었다.


우리는 자주 동쪽하늘 끝에서 서쪽하늘 끝까지를 가로지르는 마른번개를 보았다. 순식간에 나타나고 지나가버려서 어떤 기록도 남길 수 없는 무방비의 상태에서. 저런 번개를 맞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찰나의 번쩍임에 매료되었다. 무거운 비구름이 땅에 붙어 기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느 순간 비를 뿌리기 시작하면 땅과 하늘은 다리가 놓인 것처럼 하나로 이어졌다. 그렇게 크고 무거운 비구름도 전체 하늘에 비하면 보잘것없어서, 누가 원격조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땅 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과학시간에 배웠던 온갖 종류의 구름을 다 보았다. 새털구름, 양털구름, 줄무늬 구름, 엷은 층 구름, 적란운, 비구름. 이 많은 구름이 한꺼번에 다 떠 있는 모습도 보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오른쪽 창으로는 맑은 하늘이, 왼쪽 창으로는 먹구름이,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로는 비구름이 떠있는 모습을 보았다. 모든 것을 다 씻어내리는 비와 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는 일몰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다.


하늘만큼이나 대지도 변화무쌍했다. 남편이 매일 오갔던 로스앨러모스로 향하는 길 양옆으로 병풍처럼 켜켜이 서 있는 메사가 있었다. 조지아 오키프가 사랑했던 황무지가 물감으로 풀어낸 회화였다면 바람으로 조각한 바위산도 있었다. 신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는 정교하고도 멋진 조각이었다. 총길이가 3,000km에 달하는 리오 그란데 강줄기를 따라 점점 깊어지는 골짜기를 보았다.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 속에 등장해서 뉴멕시코의 상징이 되어버린 죽은 동물의 뼈는 뉴멕시코의 땅이 얼마나 죽음과 가까이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누군가 산타페에 대해서, 뉴멕시코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고 한다면 이틀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뉴멕시코를 여행지로 추천하는 일은 지금도 쉽지가 않다. 특히 미국에 처음 오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뉴욕같은 도시를 구경하고 싶은 사람에게, 혹은 유명한 국립공원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접근성도 떨어지고 그렇다 할 유명 볼거리도 없는 뉴멕시코를 추천해줄 배짱은 없다.


다만 아무 기대 없이 훌쩍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 라면, 도시 생활에 지치고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 라면 조용히 뉴멕시코로 떠나라고 알려주고 싶다. 그곳에 가면 뭔가를 하지 않아도 광활한 대지와 하늘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삶을 위로해 준다고. 황금으로 가득 찬 도시는 아니지만 황금빛의 하늘을 매일 볼 수 있는 나만의 엘도라도가 그곳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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