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인가, 지성인가>
즐겁다, 행복하다, 좋다 —
모두 ‘재미’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즐거운 행위 속에서 그 감정을 느낀다.
하루 세 끼를 먹는다.
그 속엔 분명 먹는 즐거움이 있다.
누가 만든 규칙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생존을 위한 식사는 동물의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본능에 ‘재미’를 부여할 줄 안다.
어떤 이는 미식가로서
매 끼니를 향유의 시간으로 만든다.
같은 밥이라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즐거움은 달라진다.
놀이라는 것도 있다.
육체적 활동에서 비롯된 쾌락이다.
스포츠, 등산, 섹스,
오감으로 느끼는 미술, 음악, 향기, 맛, 촉감까지 —
이 모두가 육체적 즐거움이다.
그러나 더 높은 차원의 즐거움이 있다.
지성의 쾌락.
철학적으로는 이를 ‘육감(六感)’이라 부르기도 한다.
소수의 철학자들만이 이 깊이를 안다.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은
번뇌의 원천이자 동시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근원이다.
본능은 반드시 해결해야 하지만,
감각적 즐거움과 지성적 즐거움은 선택이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너는 즐겁게 사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
그 순간, 고통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방식으로
즐거움을 흉내 낸다.
가난을 선택한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은 정신적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모른 채
평생을 살고, 그렇게 죽는다.
‘왜’ 사는지를 알아야,
‘어떻게’ 사는지를 정할 수 있다.
동물은 ‘왜’가 없다.
오직 생존만이 있을 뿐이다.
육체적 즐거움에 매달리는 사람은
남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남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살아간다.
육체적 쾌락이 동물적 본능을 지배하고,
지성적 쾌락이 그 위에 군림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사람처럼 보여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니체는 사람을 귀족과 노예로 나누었다.
정신을 지배하는 자,
정신을 지배당하는 자.
그것이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경국현,
부동산학 박사. 백혈병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다.
『죽을 뻔하고, 철학에 빠졌다』 화, 수, 목, 연재 중.
쇼펜하우어와 니체, 그리고 신과의 긴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